세계일보

검색

[여행] 추상같은 위엄… 동장군 매서운 기세도 잠재워

관련이슈 'W+'여행

입력 : 2018-01-19 10:00:00 수정 : 2018-01-17 20:40:5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단양군수로 부임했던 퇴계 이황이 노래한 단양팔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핫 플레이스’
기암절벽과 눈 쌓인 남조천… 단조롭지만 묵직한 울림 그리는데 단원 김홍도는 1년이 걸렸다
맑고 푸른 물이 흐르는 강이 아니다. 동장군의 매서운 호령에 흐르던 강물도 꼼짝 못 하고 얼어붙었다. 봄, 여름, 가을 한결같던 강줄기는 겨울이 되면 옷을 갈아입는다. 언 강물 위로 살포시 눈이 내려 마치 강줄기가 겨울이 춥다며 흰 이불을 덮은 것처럼 보인다. 익숙하던 풍경도 배경이 달라지면 자못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이 아닌 흰 도화지처럼 변한 강 위에 펼쳐지는 풍경은 이때가 아니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담을 수 있다. 갖가지 색으로 장식된 수채화의 화려함은 없다. 단조롭지만 묵직한 감동을 전하는 수묵화 한 폭의 여운은 오히려 더 클 듯싶다.

충북 단양 사인암은 남조천변에 있는 70m 높이의 기암절벽이다. 옥빛과 황금빛으로 채색한 듯한 암벽,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 같은 격자무늬 등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품은 사인암과 하얗게 얼어붙은 남조천이 어우러진 모습은 선비들이 즐겨 그린 수묵화를 연상케한다.
전국 지자체 대부분이 고장의 명승지 등을 꼽아 그 지역 ‘팔경’으로 선정한다. 많은 숫자 중 하필이면 ‘8’이다. 딱 떨어지는 ‘10’도 있을 텐데, 유독 팔경이 많다. 그 이유는 원조 격인 충북 단양에 있을 듯하다. 8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한번쯤 들어봄 직한 명칭이 ‘단양팔경’이다. 남한강과 소백산맥 줄기에서 뻗어나온 지류를 배경으로 다양한 기암들이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이루고 있다. 풍광은 예부터 있었을 텐데, 단양팔경으로 지칭된 것은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임하면서다.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8곳이 팔경이다. 이 중 옥순봉은 단양이 아닌 제천에 있지만, 퇴계가 이곳을 함께 지칭해 단양팔경에 속하게 됐다. 단양팔경이란 이름이 붙은 후 입소문이 퍼져 선비들이라면 한 번은 들려 풍광을 즐기는 조선시대 ‘핫 플레이스’로 단양이 뜬 셈이다. 이는 한양에서 남한강을 따라 물길로 닿을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단양팔경은 기존 풍광 외에 조상이 남긴 흔적들이 덧입혀져 있다. 혹여 단양팔경으로 부족하다면 새로 모습을 보이는 곳도 있다. 단양팔경이 그저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정적인 곳이라면, 새로 선보이는 곳은 직접 걸으며 온몸으로 아찔함을 느낄 수 있다. 남한강 절벽 위를 걷는 잔도와 소백산과 남한강 풍광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만천하스카이워크가 그곳이다. 오래된 풍광과 새로운 풍광이 조화를 이뤄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한 폭의 수묵화, 사인암과 도담삼봉

단양팔경 중 꽁꽁 언 계곡과 어우러져 색다른 겨울 풍경을 선보이는 곳은 사인암과 도담삼봉이다.

사인암은 남한강 지류인 남조천 변에 서 있는 70m 높이의 기암절벽이다. 고려 말 학자 우탁 선생이 정4품인 ‘사인재관’ 벼슬에 있을 때 고향인 단양을 방문하면 자주 찾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제광이 이를 기려 사인암이라 불렀다. 우탁이 지낸 벼슬명에서 따온 것이다. 단순히 우탁이 즐겨 찾았다는 이유로 이름을 붙이진 않았을 테다. 우탁은 고려 충선왕이 즉위한 뒤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을 범하자 도끼를 들고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지부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임금의 잘못을 일깨우기 위해 “내 말이 잘못됐다면 도끼로 목을 쳐도 좋다”는 의미로 목숨을 내놓고 상소를 올린 그의 기개를 높이 샀을 것이다. 또 우탁은 작가가 알려진 시조 중 가장 오래된 ‘탄로가’를 남기기도 했다.

사인암에선 선비들이 새겨놓은 이름과 시구 등을 볼 수 있다.
우뚝 솟은 기암절벽 사인암은 우탁 선생의 기개만큼 곧음을 자랑한다. 거기에 옥빛과 황금빛 등으로 채색한 듯한 암벽과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 같은 격자무늬, 암벽 정상 위 소나무, 이와 어우러진 하얗게 얼어붙은 남조천은 선조가 즐겨 그린 수묵화 한 폭 그 자체다.

범부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풍광인데 선비들이 느낀 감흥은 더 컸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사인암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단원 김홍도는 사인암을 보고 그 모습을 바로 그리지 못하고 1년여가 지난 후에나 그림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이 풍광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뇌를 한 것이다.

남조천 건너편에서 사인암을 보는 것만으로는 아쉽다. 풍광 외에도 사인암은 가까이 다가가면 암벽에 새긴 다양한 서체들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이곳을 찾은 선비들이 암벽에 이름과 시구 등을 새긴 것이다. 사인암에 오목새김 된 선조의 이름만 해도 27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나름 ‘인증샷’을 남긴 셈이다. 선조의 다양한 서체를 볼 수 있는 박물관 역할도 같이 하고 있다.

사인암 주변 평평한 돌에는 장기판과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선비들은 사인암을 한 번 둘러보기만 하고 돌아가진 않았다. 사인암 주변 평평한 돌에는 장기판과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남조천과 사인암을 끼고 장기와 바둑을 두며 풍류를 즐긴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단양팔경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담삼봉이다. 남한강 한복판에 봉우리 세 개가 떠 있는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남편봉, 왼쪽에는 첩봉, 오른쪽은 처봉으로 불리는 세 봉우리가 솟아 있다. 이처럼 불리는 것은 그 형태와 관련 있다. 남편과 아내는 사이가 좋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남편은 첩을 얻어 아기를 가졌다고 한다. 이에 첩은 남편 쪽을 향해 자랑스레 배를 내밀고 있고, 아내는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모양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단양팔경 중 가장 유명한 도담삼봉은 남한강 한복판에 봉우리 세 개가 떠있는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이 지속되면 남한강이 얼어 도담삼봉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보내며 도담삼봉 풍광에 반해 호를 삼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전설도 있다. 강원 정선의 삼봉산이 홍수가 났을 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는데, 그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에 세금을 냈다. 이를 안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오게 한 것도 아니고,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얘깃거리로는 제격이다.

사인암 앞을 흐르는 남조천은 얕아 찬바람이 좀 불면 두껍게 얼지만, 남한강은 다르다. 강이 깊어 웬만한 추위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지 않는다. 하지만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이 지속되면 남한강도 얼어붙는다. 그러면 도담삼봉까지 걸어서 가볼 수 있다.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도담삼봉의 새로운 모습이다.

충북 단양의 남한강 잔도는 수면에서 20m 높이 절벽에 길을 놓은 것이다. 앞사람이 가는 길을 보면 자신이 공중에 떠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진대교부터 시작되는 잔도는 1.2㎞로 20여분 정도 걸으면 된다.
◆아찔함을 품고 하늘을 걷다

‘쩌어억’

겨울 하천은 고요하다. 하지만 이 정적을 깨는 소리가 간혹 귓전을 때린다. 바로 얼었던 강이 녹으면서 내는 소리다. 강 주변에서 이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강 위에서 듣는다면 아찔함은 더 커진다. 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서 아찔한 묘미를 즐길 수 있는 길을 잔도라 부른다. 하천이나 땅에서 얼마 높지 않은 높이에 놓인 잔도라면 그리 겁을 먹을 필요 없다.

하지만 그 높이가 20여m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좁은 길의 폭을 넓힌 것이 아니라 남한강 절벽에 새로 길을 놓은 것이다. 자신이 걸을 땐 잘 못 느끼지만, 앞사람이 가는 길을 보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저런 모습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상진대교부터 시작되는 남한강 잔도는 1.2㎞로 20여분이면 충분히 지난다. 하지만 그 시간이 녹록지 않다. 나무로 조성한 잔도는 군데군데 철망만 쳐 있어 보기 싫더라도 아래를 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아찔함은 잔도를 걷는 초반에 느껴지지, 조금 걷다 보면 익숙해진다. 그때부턴 하얗게 언 남한강 위를 걷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다만, 바로 아래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릴 때 느끼는 아찔함은 익숙해지기 힘들다.

단양 만천하스카이워크 전망대는 만개의 골짜기와 1000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만학천봉 위에 있어 만천하로 이름 붙였다. 소백산 연화봉 등 산봉우리들과 남한강이 빚어낸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잔도 끝에 이르렀다고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더 강한 곳이 준비돼 있다. 바로 만천하스카이워크 전망대다. 이름처럼 만천하를 내려다본다는 의미인데, 전망대 위치가 만개의 골짜기와 1000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만학천봉 위에 있어 만천하로 이름 붙였다. 해발 320m 봉우리 위에 세워졌지만, 남한강 수면 기준으로는 봉우리가 80∼90m 위에 있다. 그 위에 25 높이로 세워진 전망대다. 100m 정도 위에서 소백산 연화봉 등 산봉우리들과 남한강이 빚어낸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특히 바닥이 압권이다. 다른 전망대들은 일부분만 바닥이 유리인데, 만천하스카이워크는 대부분이 유리와 철망으로 돼 있다. 높은 곳을 싫어하는 이들이라면 전망대 끝에 서는 것이 쉽지 않고 뒤에서 바라봐야 할 듯싶다.

단양의 숲 속 헌책방 새한서점은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으로 주인이 직접 나무 판자 등을 이용해 건물을 세우고, 책꽂이를 만들었다. 흙바닥에 서있는 책꽂이 꽂힌 책만 해도 13만여점에 이른다.
아찔함을 즐긴 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면 숲 속 헌책방 새한서점(적성면 현곡리)을 들러도 좋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과 조승우가 밥을 먹던 시골집으로 등장했던 곳이다. 단양에서도 구석에 있다. 길 옆에 주차를 한 뒤에 200m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으로 주인 이선명씨는 서울에서 중고서점을 하다 16년 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직접 나무 판자 등을 이용해 건물을 세우고, 책꽂이를 만들었다. 흙바닥에 서있는 책꽂이에 꽂힌 책만 해도 13만여점에 이른다. 아마 기억에서도 잊힌 오래된 추억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단양=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