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절벽과 눈 쌓인 남조천… 단조롭지만 묵직한 울림 그리는데 단원 김홍도는 1년이 걸렸다 맑고 푸른 물이 흐르는 강이 아니다. 동장군의 매서운 호령에 흐르던 강물도 꼼짝 못 하고 얼어붙었다. 봄, 여름, 가을 한결같던 강줄기는 겨울이 되면 옷을 갈아입는다. 언 강물 위로 살포시 눈이 내려 마치 강줄기가 겨울이 춥다며 흰 이불을 덮은 것처럼 보인다. 익숙하던 풍경도 배경이 달라지면 자못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이 아닌 흰 도화지처럼 변한 강 위에 펼쳐지는 풍경은 이때가 아니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담을 수 있다. 갖가지 색으로 장식된 수채화의 화려함은 없다. 단조롭지만 묵직한 감동을 전하는 수묵화 한 폭의 여운은 오히려 더 클 듯싶다.
충북 단양 사인암은 남조천변에 있는 70m 높이의 기암절벽이다. 옥빛과 황금빛으로 채색한 듯한 암벽,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 같은 격자무늬 등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품은 사인암과 하얗게 얼어붙은 남조천이 어우러진 모습은 선비들이 즐겨 그린 수묵화를 연상케한다. |
단양팔경 중 꽁꽁 언 계곡과 어우러져 색다른 겨울 풍경을 선보이는 곳은 사인암과 도담삼봉이다.
사인암은 남한강 지류인 남조천 변에 서 있는 70m 높이의 기암절벽이다. 고려 말 학자 우탁 선생이 정4품인 ‘사인재관’ 벼슬에 있을 때 고향인 단양을 방문하면 자주 찾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제광이 이를 기려 사인암이라 불렀다. 우탁이 지낸 벼슬명에서 따온 것이다. 단순히 우탁이 즐겨 찾았다는 이유로 이름을 붙이진 않았을 테다. 우탁은 고려 충선왕이 즉위한 뒤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을 범하자 도끼를 들고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지부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임금의 잘못을 일깨우기 위해 “내 말이 잘못됐다면 도끼로 목을 쳐도 좋다”는 의미로 목숨을 내놓고 상소를 올린 그의 기개를 높이 샀을 것이다. 또 우탁은 작가가 알려진 시조 중 가장 오래된 ‘탄로가’를 남기기도 했다.
사인암에선 선비들이 새겨놓은 이름과 시구 등을 볼 수 있다. |
범부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풍광인데 선비들이 느낀 감흥은 더 컸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사인암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단원 김홍도는 사인암을 보고 그 모습을 바로 그리지 못하고 1년여가 지난 후에나 그림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이 풍광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뇌를 한 것이다.
남조천 건너편에서 사인암을 보는 것만으로는 아쉽다. 풍광 외에도 사인암은 가까이 다가가면 암벽에 새긴 다양한 서체들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이곳을 찾은 선비들이 암벽에 이름과 시구 등을 새긴 것이다. 사인암에 오목새김 된 선조의 이름만 해도 27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나름 ‘인증샷’을 남긴 셈이다. 선조의 다양한 서체를 볼 수 있는 박물관 역할도 같이 하고 있다.
사인암 주변 평평한 돌에는 장기판과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
단양팔경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담삼봉이다. 남한강 한복판에 봉우리 세 개가 떠 있는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남편봉, 왼쪽에는 첩봉, 오른쪽은 처봉으로 불리는 세 봉우리가 솟아 있다. 이처럼 불리는 것은 그 형태와 관련 있다. 남편과 아내는 사이가 좋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남편은 첩을 얻어 아기를 가졌다고 한다. 이에 첩은 남편 쪽을 향해 자랑스레 배를 내밀고 있고, 아내는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모양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단양팔경 중 가장 유명한 도담삼봉은 남한강 한복판에 봉우리 세 개가 떠있는 독특한 풍광을 자랑한다.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이 지속되면 남한강이 얼어 도담삼봉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
사인암 앞을 흐르는 남조천은 얕아 찬바람이 좀 불면 두껍게 얼지만, 남한강은 다르다. 강이 깊어 웬만한 추위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지 않는다. 하지만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이 지속되면 남한강도 얼어붙는다. 그러면 도담삼봉까지 걸어서 가볼 수 있다.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도담삼봉의 새로운 모습이다.
충북 단양의 남한강 잔도는 수면에서 20m 높이 절벽에 길을 놓은 것이다. 앞사람이 가는 길을 보면 자신이 공중에 떠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진대교부터 시작되는 잔도는 1.2㎞로 20여분 정도 걸으면 된다. |
‘쩌어억’
겨울 하천은 고요하다. 하지만 이 정적을 깨는 소리가 간혹 귓전을 때린다. 바로 얼었던 강이 녹으면서 내는 소리다. 강 주변에서 이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강 위에서 듣는다면 아찔함은 더 커진다. 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서 아찔한 묘미를 즐길 수 있는 길을 잔도라 부른다. 하천이나 땅에서 얼마 높지 않은 높이에 놓인 잔도라면 그리 겁을 먹을 필요 없다.
하지만 그 높이가 20여m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좁은 길의 폭을 넓힌 것이 아니라 남한강 절벽에 새로 길을 놓은 것이다. 자신이 걸을 땐 잘 못 느끼지만, 앞사람이 가는 길을 보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저런 모습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상진대교부터 시작되는 남한강 잔도는 1.2㎞로 20여분이면 충분히 지난다. 하지만 그 시간이 녹록지 않다. 나무로 조성한 잔도는 군데군데 철망만 쳐 있어 보기 싫더라도 아래를 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아찔함은 잔도를 걷는 초반에 느껴지지, 조금 걷다 보면 익숙해진다. 그때부턴 하얗게 언 남한강 위를 걷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다만, 바로 아래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릴 때 느끼는 아찔함은 익숙해지기 힘들다.
단양 만천하스카이워크 전망대는 만개의 골짜기와 1000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만학천봉 위에 있어 만천하로 이름 붙였다. 소백산 연화봉 등 산봉우리들과 남한강이 빚어낸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
단양의 숲 속 헌책방 새한서점은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으로 주인이 직접 나무 판자 등을 이용해 건물을 세우고, 책꽂이를 만들었다. 흙바닥에 서있는 책꽂이 꽂힌 책만 해도 13만여점에 이른다. |
단양=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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