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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 만리경] 스포츠 남과 북, 결정적 순간들…신금단부터 미녀응원단까지

입력 : 2018-01-06 07:35:00 수정 : 2018-01-05 17: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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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8일 일본 삿포로 산치토세 공항에서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단 임원으로 온 여동생 한필화씨를 부둥켜 안고 오열하고 있는 한필성(오른쪽)씨. 1950년 헤어진 지 40년만의 혈육상봉으로 큰 감동을 남겼다.

[SG 만리경] 스포츠 남과 북, 결정적 순간들

서울서 평양까지 거리는 1번국도를 기준으로 232km에 불과하다. 17만원이면 서울시청에서 택시를 타고 평양까지 갈 수 있다.

남과 북은 그만큼 가깝지만 전 세계 어느 곳보다 가기 힘든 곳이다.

남과 북의 만남은 어느 일방의 의지로는 이뤄질 수 없다. 복잡한 국제 정세, 역학관계, 국내 사정 등이 얼키고 설켜 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갈라선 1945년 이후 접촉기회가 가장 많았던 분야는 스포츠이다.

각종 국제대회 출전 등으로 마주할 기회가 많고 정치색이 옅기 때문이다.

◇ 갈등으로 치닫던 21세기 남북 관계, 평창올림픽이 전환점 될 수도

남북 관계는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해 왔다. 21세기 들어 금강산을 넘어서 평양, 묘향산 관광단까지 등장하는 등 움직임이 활발했지만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이후 갈등 증폭과 천안함, 금강산 관광객 사망 등의 일이 겹쳐 바짝 얼어 붙었다.

그러는 동안 북한은 핵과 탄도미사일 실험을 지속적으로, 강도높게 진행해 와 남과 북의 봄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런 가운데 오는 9일 남과 북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참가' 문제 등을 놓고 판문점에서 만남을 갖기로 했다.

결과를 예단할 순 없지만 스포츠가 남과 북의 해빙에 큰 몫을 해 온 전례를 볼 때 어떤 계기가 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잊을 수 없는 남과 북의 스포츠 만남과 현장

▲ 1946년 3월 26일 제7회 경평축구 이후 뚝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남과 북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 높고 두꺼운 38선이 가로 놓였다.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갈라 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과북의 스포츠 교류는 1946년 3월 2일 제 7회 경평축구대회를 끝으로 1990년 남북통일축구 때까지 무려 44년간 차단됐다. 

제 7회 경평축구대회도 평양선수들이 어렵게 육로로 내려온 끝에 간신히 성사됐다. 평양대표팀은 돌알 갈 때 육로가 위험하다고 판단, 배편으로 북으로 갔다.

▲ 1963년 12월 22일 남자배구, 1946년 경평축구 이후 첫 남북 대결

1946년 제7회 경평축구대회 이후 남과북이 스포츠에서 격돌한 것은 17년 9개월여가 흐른 1963년 12월 12일 뉴델리에서 열렸던 도쿄올림픽 남자배구 아시아 예선이다.

경평축구가 도시 대항전인 점을 감안하면 남과 북을 대표해 맞붙었던 것은 사실상 이 경기가 처음이다.

손영완 전 아르헨티나,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 뛰었던 한국 대표팀은 첫세트를 7-15로 내줬지만 풀세트 접전끝에 3-2로 승리했다.

▲ 1964년 10월 9일 신금단 부녀 상봉

1964년 10월 9일 일본 도쿄 조선회관에서 딸 신금단(왼쪽)을 단 10분간 만난 아버지 신문준씨는 애틋한 눈빛으로 딸을 쳐다보면서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남과북을 단절된 이후 사상 처음 이뤄진 이산가족 만남이었다.

노래(눈물의 신금단)까지 만들어졌던 신금단 부녀 상봉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이뤄진 이산가족 만남으로 남과 북 이산의 아픔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씨는 1951년 1월, 1·4후퇴때 "곧 오겠다"며 12살 딸 신금단 등 가족과 헤어져 혼자 남쪽으로 피난 내려 왔다. 이후 서로가 생사조차 모른 채 가슴앓이하면서 지냈다. 

떨어져 지내는 사이 신금단은 세계적인 여자 중거리 육상선수로 성장했다.  196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회 가네포 대회(신생국 경기대회)에서 400m와 800m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는 200m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신금준씨는 '신금단이라는 북한 간판스타'소식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접하자 "내 딸 금단이가 맞다"며 대한올림픽 위원회 등을 찾아가 "만나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남과 북은 1964년 10월 도쿄올림픽때 부녀 만남을 주선키로 물밑에서 합의했다.  

세계적 육상선수 신금단이 도쿄 올림픽에서 최소 2개의 금메달(여자 육상 400, 800m), 많으면 3개의 금메달(여자 200m)을 딸 것으로 확신한 북한은 체제선전을 겸해 부녀 상봉을 허락했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 북한으로 돌아갈 때까지 부녀 만남의 기회가 마련됐지만 일은 엉뚱하게 꼬였다.

국제올림픽 위원회(IOC)는 가네포 대회를 '올림픽 회원국들을 정치적 이유로 갈라 놓는 등 올림픽 정신을 위반한 유사 올림픽 대회'라고 규정, "가네포 대회에 출전한 국가는 올림픽에 나올 수 없다"라는  징계를 내렸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선수단 철수라는 강경대응을 했다.

신금단 부녀 상봉도 무산될 위기에 처했으나 우여곡절끝에 남과 북은 북한 선수단이 니가타행 열차에 타기 직전, 10월 8일 도쿄 조선회관에서 10분간 이들이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신금단 부녀의 사연은 노래로까지 만들어져 황금심씨가 불렀다.

신금단은 "어머니와 동생들은 다 잘 있다"고 눈물로 아버지가 가장 기다렸던 말을 남겼다.

딸과 짧은 만남을 끝낸 신금준씨는 택시를 타고 급히 우에노역으로 가 역장실에서 딸을 마지막으로 안아볼 수 있었다.

신금준씨는 1983년 12월 27일 67세로 사망했다.

11차례나 세계기록을 작성했던 신금단은 '인민체육인'칭호를 받았으며 북한 육상대표팀 코치, 세계선수권 북한 단장 등 요직을 거쳤다.

▲ 1976년 5월6일 아시아청소년 축구 북한전...광복 후 첫 남북축구, 북한 1-0승

축구는 남과 북 모두 최고의 인기종목이다.

축구에서 남과북 대표(각급 대표팀 이상)가 처음 격돌한 것은 1976년 5월 6일 태국 방콕에서 열렸던 제18회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준결승이었다.

당시 한국은 0-1로 패했다.

▲ 남과 북 모두 엄청난 부담감 안고 붙었던 1978방콕 아시아게임 축구결승

1978년 12월20일 방콕아시안게임 결승 때 차범근(왼쪽)의 돌파를 결사적으로 막고 있는 북한 대표선수.  처음으로 만난 남과 북 국가대표팀은 120분간의 혈투끝에 0-0으로 비겨 공동우승이라는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남과 북 스포츠 맞대결 중 가장 유명했고 선수들 부담감또한 최고였던 경기는 1978년 12월 20일 방콕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이다.

최초의 축구A대표 격돌이었기에 남북한의 관심은 대단했다.

김호곤 주장(전 축구협회 부회장), 골게터 차범근 등을 내세운 한국은 120분간의 혈투끝에 0-0무승부, 공동우승했다. 누구도 이기지 않고 누구도 지지 않아 비난 등 피해역시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았던 공동우승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좋았던 시나리오로 여겨지고 있다.  

▲ 한필성-한필화 남매, 21년만의 통화→만남은 그 후 19년 뒤에나 

1971년 2월17일 서울의 오빠 한필성(왼쪽)씨가 삿포로 프레동계올림픽에 북한 대표선수로 온 동생 한필화와 국제전화를 하고 있다. 이들 남매의 만남은 그 후 19년뒤에나 성사됐다.

남과 북 스포츠 하면 한필성(1934년생), 한필화(1941년생) 남매를 빼놓을수 없다.

16살이던 1950년 홀로 남쪽으로 내려온 한필성씨는 북에 두고온 부모와 2명의 누나, 3명의 동생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71년 2월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프레동계올림픽에 북한 대표로 참가한 한필화가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고 고향(평안남도 진남포), 가족 등을 말한 내용을 뉴스로 접했다.

한필성씨는 "필화가 내 여동생같다"며 언론사로 달려갔다 이 후 두 남매 사연이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북한 선수단이 "한필화 선수 어머니가 한필성씨가 필화의 오빠로 보인다라는 연락을 해 왔다"고 한국선수단, 일본 언론에 알렸다.

한필성-필화 남매는 1971년 2월 17일 아사히 신문주선으로 서울과 삿포로에서 30여분간 전화 통화를 갖고 가족상황 등을 파악한 끝에 친남매임을 확인했다.

기쁨에 넘친 한필성씨는 곧장 일본으로 달려갔으나 협조적이었던 북한 선수단측이 태도를 바꾸는 바람에 동생을 보지 못했다.

한필성-필화 남매가 얼굴을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19년이 흐른 1990년 3월 8일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을 통해서다.

한필화씨가 북한선수단 임원으로 삿포로에 온 사실이 알려지자 '남매가 상봉할 것인가'를 놓고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관심을 쏟았다. 

3월 7일 동생과 19년만이자 월남이후 두번째 통화를 한 한필성씨는 곧장 삿포로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필성씨는 3월 8일 밤 8시30분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에서 동생 한필화씨와 만나 부둥켜 안았다. 40년만의 남매상봉은 대단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 1990년 10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열렸던 통일축구

1990년 10월 11일 평양(위), 10월 23일 서울서 열렸던 남북통일축구대회 모습.

1990년 9월초에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를 계기로 남북스포츠 교류 문제도 논의가 이뤄졌다. 그 결과 1990년 제11회 베이징아시안게임 중이던 9월29일 장충식 한국선수단장과 김형진 북한선수단장이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남북(북남)통일축구대회'를 갖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양측은 △ 4박 5일 동안 평양과 서울을 각각 상호방문한다 △ 유니폼에는 국가표시를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신분보장을 한다라는 약속을 했다.

베이징아시안게임을 마친 축구대표팀은 곧장 평양으로 이동 1990년 10월 11일 오후 3시에 평양의 5·1경기장(능라도 경기장)에서 15만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북한과 1차전을 가졌다. 1차전에선 북한이 2-1로 이겼다.

2차전은 10월 23일 88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렸으며 남측이 1-0승했다.

▲ 1991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코리아', 세계정상 

사상 첫 남북단일팀 '코리아'의 주축선수들. 왼쪽부터 현정화, 유남규, 김성희, 리분희. 현정화-리분희는 여자단체전 우승이라는 큰일을 해 냈다.  

맞대결만 하던 남과북은 1991년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을 만들어냈다.해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리는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을 구성해 출전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팀 명칭은 '코리아', 깃발은 하늘색 '한반도기'로 택했다.

현정화(남), 리분희(북)를 앞세운 남북단일팀은 4월 29일 여자단체 결승에서 중국을 3대2로 꺾고 우승해 더 큰 감동을 안겼다.

▲ 1991세계청소년축구대회 남북단일팀 8강

1991포르투갈 세게청소년축구대회서 남북단일팀 '코리아'는 8강까지 진출했다. 가운데 8번을 단 선수는 부산아이파크 감독으로 있던 중 지난해 10월 사망한 고 조진호 감독.

분위기를 탄 남과북은 1991년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현 FIFA U-20 월드컵)에도 남북단일팀을 파견했다. 명칭과 깃발은 탁구세계선수권과 같았다.

남북단일팀 감독은 북한의 안세욱이, 코치는 한국의 남대식이 맡았다.

트레이너 최만희(남), 문기남(북) 등 지도자부터 선수 구성에서 남과 북은 1대1 원칙을 지켰다.

이임생(대한축구협회 기술발전위원장), 강철(FC서울 수석코치), 전 부산아이파크 감독인 고 조진호 등이 나선 청소년 단일팀은 8강까지 진출했다.

▲ 2000시드니 올림픽 공동입장 

2000년 9월 15일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서 한반도기를 앞세워 공동입장하고 있는 한국, 북한 선수단. 당시 공동기수는 북한 유도팀 박정철 감독(왼쪽)과 한국여자농구대표 정은순이 맡았다.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추구,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 

그 결과 200시드니 올림픽 개막식 때 한반도기를 앞세운 남북한 선수단이 처음으로 공동입장했다. 

▲ 북한 응원단 붐을 일으켰던 2002부산아시안게임 

컴퓨터와 같은 잘 짜여진 율동, 빼어난 미모 등 숱한 화제를 남겼던 2002부산아시안게임 북한응원단.

2002년 부산에서 개최된 2002아시안게임 히트상품은 단연 북한응원단. 수려한 용모의 북한 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신드롬'을 형성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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