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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텅 빈 절터에 스며든 시간 … 아무것도 없지만 충만하다

입력 : 2017-12-09 14:00:00 수정 : 2017-12-09 13: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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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시간 # 건축의 가장 좋은 재료, 시간

건축물은 인간이 짓지만 시간이 완성시킨다. 건축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시간이다. 시간은 어떤 건물이건, 잘 지은 건물이건 어수룩한 건물이건 장점을 만들어내고 단점을 덮어주고 아름답게 다듬어준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이 만든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외면한 채 자꾸 지운다.

연륜이 쌓인 건축물 말고도 공간에 시간의 흐름을 넣은 훌륭한 건축물이 간혹 있다. 그런 공간에서 우리는 건축이 주는 대단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종묘나 봉정사에 있는 영선암, 퇴계 이황이 짓기 시작하고 그의 제자 조목이 완성한 도산서원 같은 건축이 바로 그런 예이다.

또는 애초에 건축적 계산으로 완성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켜켜이 퇴적되어 있고 기억이 바닥에 질펀하게 깔린 폐사지의 정경은 우리의 눈으로 느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공감각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거돈사 터에는 잔디가 곱게 깔리고 잘생긴 삼층석탑과 부처님이 앉아있던 대좌가 터의 한가운데 남아 있다.
사실 시간성은 무척 어려운 이야기이고 설명하기 힘든 건축의 개념이긴 하다. 특히 폐사지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시간의 흔적이 덮여서만은 아니다. 공간과 사람의 인식과 기억이 접촉하며 만들어내는 묘한 화학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속성은 흐름이다. 멈춰 있는 시간이란 없다. 언제나 현재이며 영원히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과거를 만들어낸다. 마치 시간이 버리고 간 부스러기처럼 과거들이 무수히 널려 있다. 그걸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는 건축가는 정말 뛰어난 건축물을 만들고 그런 건축물을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부른다.

나는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자랐다. 그런데 보는 관점과 시각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많이 바뀌었다. 어린 시절의 도시는 주로 동네 골목을 헤집고 다닐 때 피부로 느껴지는 도시였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에는 주로 통학을 하거나 시간이 남으면 타고 다니는 버스를 통해 도시를 봤다. 그리고 지금은 지하철을 타거나 운전을 하면서 도시를 본다. 도시를 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도시 또한 빠르게 변하며 점점 그에 대한 감정이 희석되는 느낌이 든다. 그냥 도시는 나와는 상관없이 지나간다.

이건 도시라는 특정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자신이 사는 곳이 도시건 농촌이건 바닷가이건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사람은 장소를 배경으로 장소를 밑천으로 살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장소와 떨어져나가고 관계를 회복하기 힘들어진다.

청소년기, 나의 취미는 우표수집이나 그림그리기, 펜팔이나 뭐 그런 당시 또래들이 선호하는 것들이 아니고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배회가 나의 취미였고 그 대상은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공간들이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버스를 타고 바깥을 보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그때 살고 있던 집이 수유리에 있었는데 근처에 버스회사가 많이 있어서 덩달아 주변에 버스 종점이 많았다. 그런 동네에 사는 가장 큰 혜택은 버스를 탈 때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을 마당처럼 동네 집과 어우러져 있던 흥법사 터에 갔을 때 겨울 햇살이 포근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 버스를 타고 떠나는 시간 여행

버스를 타고 도시의 풍경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멀리 있었던 학교에 통학을 하면서였다. 수유리에 있는 집에서 동부이촌동에 있는 학교까지 가자면 화계사에서 출발하는 84번 버스를 타고 미아리, 길음동, 돈암동, 삼선교, 혜화동, 안국동, 종로, 명동, 남대문, 동자동, 삼각지를 거쳐 용산역 앞에서 내렸다.

나는 종점까지 걸어가서 버스에 오르고 내가 정한 지정석에 앉아서 하염없이 창밖을 쳐다봤다. 도시의 일상이 지나가고 있었고 변두리에서 점점 도심으로 들어가며 진해졌다가 다시 묽어지는 도시의 농도를 맛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길을 감싸고 있는 다양한 건물의 표정… 도시의 껍질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오며 가며 하루에 두 시간이 넘는 도시 관찰을 했는데 반년 정도 통학을 하고는 전학을 하게 되어 그 여행을 마쳐야 했다. 그래서 나는 따로 시간을 내서 ‘버스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내가 애용하던 버스는 우이동에서 우이동으로 순환하는 8번 버스였다. 그 버스는 서울 중심지를 꿰뚫고 지나가는데, 우이동에서 수유리, 미아리를 거쳐 길음동에서 두 개의 노선으로 갈라진다. 한 방향은 북악터널을 지나 평창동, 구기동, 홍은동을 거치고 신촌으로 가서 광화문 쪽으로 향하고, 다른 방향은 돈암동을 거쳐 혜화동, 광화문을 지나 신촌 평창동 쪽으로 도는 노선이다.

두 개의 궤도는 같은데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나는 주로 북악터널 평창동을 먼저 거치는 방향의 버스를 선호했다. 그 당시만 해도 산이 많이 보이고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목가적인 풍경을 먼저 즐기다가 도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큰 개울을 지나고 크고 깊은 산을 지나고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마을을 지나고 북악터널을 지나면 ‘엄이건축’ 간판이 붙은 멋진 건물이 나오고, 세검정을 지나고, 바위에 커다란 부처가 새겨진 물가를 지나 대학들이 즐비한 동네를 지난다. 그리고 도시의 번화함으로 들어가는 한 시간의 여행이 언제나 나를 황홀하게 했다.

나는 혼자서 깊은 침묵에 빠져서 도시에 집중하였고, 마치 설탕 항아리에 빠져들어 가는 곤충처럼 풍경을 탐닉했다. 아니 도시를 탐닉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건축은 나의 생계수단이며 평생의 일이 되었다.

건축을 내가 하게 되리라고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어릴 때 나의 꿈은 막연히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슨 꿈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짓도 과장도 아니라 나의 꿈은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이었고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무기력한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권유’로 건축학과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사전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사실 첫 수업을 들으며 무척 당황했다. 내가 아는 건축이란 현장에서 보호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공사를 감독하는 일 오로지 그 영상 하나뿐이었는데, 대학에서 이야기하는 건축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미술이나 여타 예술에 가까워서, 당시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분야였다.

대학 가기 전까지 한번도 제대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으며 조형이나 공간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나왔다. 설계사무실에 취직을 했지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자문해 보았다.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4년을 보냈고 건축이 뭔지도 모른 채 졸업을 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건축물을 답사하는 일이었다. 주로 사연이 많이 남아있는 살림집들과 땅과의 조화가 아름다운 절들을 돌아다녔다.

# 폐사지에서 시간의 성찬을 즐기다

그러다 어느 해지는 저녁에 경주에 있는 황룡사 터에 가게 되었다. 그 너른 들판에 사람은 거의 없었고 태양이 길게 그림자를 남기며 사라져가는 가운데, 예전에 공간을 만들었을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풍경은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둥을 받쳤을 초석들과 부처님이 앉았을 대좌는 나에게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게 하였으며, 어떤 공간보다도 훨씬 풍요로웠다. 말하자면 수용자가 직접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공간이었다.

이후로 나는 절터에 많이 간다. 인적이 아주 드문 그곳들은 우주의 호흡처럼 크고 우렁차지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그득하고 여러 가지 건축물 장식물로 채워졌던 곳, 폐사지는 한때의 청춘을 간직한 곳이다.

유난히도 추웠던 2017년 초에 나는 예전에 버스를 타고 도시를 순례하듯 혼자서 폐사지를 돌아다녔다. 1월에는 경상북도를 돌아다녔고 2월에는 원주와 여주 근방을 돌아다녔다. 주말 동안 법천사 터, 거돈사 터, 흥법사 터, 그리고 조금 떨어진 여주에 가서 고달사 터를 둘러볼 요량으로 겨울 해도 뜨기 전에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들어섰을 때 꽁꽁 얼어붙은 날씨와 아주 청명한 겨울 하늘이 퀭한 표정으로 걸려 있었다.
법천사는 ‘진리의 샘’ 혹은 ‘진리가 샘처럼 솟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절이다. 문화재 발굴을 하는지 줄이 둘러쳐 있고, 그 한가운데 무척 늙은 나무가 법천사의 상징처럼 혹은 법천사의 정수가 스며든 듯 홀로 서 있었다.
방금 해가 뜬 법천사 터로 갔다. 법천사는 ‘진리의 샘’ 혹은 ‘진리가 샘처럼 솟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절이다. 국도를 한참 달리다 길에서 벗어나 다리를 건너자 너른 터가 나왔다. 그리고 역시나 너른 터에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들어가면 인가가 몇 채 있고 멀찍이 흙으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은 극히 단순하게 돌로 만들어놓은 당간지주가 서있을 뿐이다.

지금은 문화재 발굴을 하는지 줄을 쳐놓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무척 늙은 나무가 법천사의 상징처럼 혹은 법천사의 정수가 스며든 듯 홀로 서 있었다.

이곳은 신라시대 성덕왕대에 창건하고 고려시대에 무척 큰 절로 성장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곳을 거쳐 간 스님 중에서 지광국사라는 스님이 무척 유명하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너른 터는 동쪽으로 산을 기대로 있었는데 그 중턱에 잘 만들어진 탑비가 하나 놓여 있었다. 호리호리한 인상의 거북등에 훤칠한 탑비가 서있었고 상륜부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 안에는 지광국사의 공덕에 대한 내용이 아주 정성들여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1300명이 넘는 제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추운 겨울 이른 아침, 아직 해가 동쪽에서 비스듬히 땅 위에 비치는 시간에 부도비 하나와 꺼부정한 노거수 한 그루가 두 개의 흔적처럼 남아 있는 법천사 터는 아무것도 없지만 무언가 충만한 느낌을 주었다.

탑비 옆으로 쌓아놓은 석축 위에 앉았다.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앉아있자니, 시간이 나를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도시를 흘러가는 것처럼 그 안에는 천년이 넘는 시간이 법천사의 흥망성쇠가 흘러서 지나갔다.

잔디가 곱게 깔리고 잘생긴 삼층석탑과 부처님이 앉아있던 대좌가 터의 한가운데 남아있는 거돈사 터, 그리고 마을 마당처럼 동네 집과 어우러져 있던 흥법사 터에 갔을 때 겨울 햇살이 포근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정성들여 만든 부도비를 받치고 있는 용의 머리를 가진 거북이 빈 터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어김없이 절터에 앉아있었다.

짧은 겨울 하루 동안 나는 무척 많은 시간의 흐름에 몸을 싣고 흘러다닐 수 있었고 무척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차려놓은 풍성한 식탁에서 성찬을 즐기고 돌아왔다.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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