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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준의 한국은 지금] 응답하라 1997 당구장…형님·일진 놀이터서 스포츠 공간으로

입력 : 2017-11-11 11:54:24 수정 : 2017-11-11 12: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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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30대~40대가 중·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는 덩치 큰 형님들과 학교에서 논다고 소문난 친구들이 당구장을 놀이터 삼아 인식이 좋지 못했다.
그 후 시간이 지나 부정적인 면은 줄고, 스포츠 공간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당시나 지금이나 '마세'는 300점 이하 금지다. (사진= 커뮤니티 캡처)
■ 응답하라 1997 당구장
1990년대 당구장에 대한 기억은 담배 연기 자옥하고 인근에서 들리는 일본식 당구용어 그리고 거친 말이 오가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공간이 없었던 터라 노래방, 당구장, 호프집 등이 젊은 층에 인기를 얻었는데, 해가 떠 있을 때 갈 곳을 찾지 못한 형님들과 학교에서 논다고 소문난 일부 학생들이 방과 후 조숙해 보이는 친구를 앞세워 출입하곤 했다.

당구장은 학생 출입이 가능했지만 학교는 학생들 출입을 탐탁지 않아 했다. 각 학교주임과 선도부가 수시로 들이닥쳐 게임을 즐기는 학생들의 이름과 학년 등을 적어가 해당 학교로 통보하는 제보시스템이 있었다. 또 경찰 단속이 수시로 이뤄져 남은 점수를 풀기 전 당구장을 나와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 “당시 당구장은 겸손함과 매너를 배우는 곳이었다“
우스갯소리지만 “당구장에서 겸손함과 매너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앞서 당구장에 덩치 큰 형님들과 노는 친구들이 많았던 이유에서 비롯된다.
당구를 치다 보면 당구대와 당구대 사이를 오가며 공을 쳐야 하는데, 이때 상대와 몸을 부딪치거나 '큐(CUE)'로 상대를 가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운이 나빠 형님들을 방해하면 그들이 느낄 불쾌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정중히 사과하고 ‘선(先)당구(먼저 공을 치게 양보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를 권했다.

간혹 이러한 ‘당구장의 규칙’을 무시하면 싸움이 발생하거나 고성이 오가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당구장 내 불화를 그린 일러스트. 큐로 슈퍼맨이 올려 둔 음료를 쳤다. 자칫 험악한 분위가 나올 수 있다. (커뮤니티 캡쳐)
■ 형님·일진 놀이터서 문화·스포츠 공간이 된 2017 당구장
지금 당구장은 과거 유흥가에서 주택단지나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 주로 위치한다.
영업장의 이동은 손님 감소로 과거보다 수익성이 떨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주 고객층이 30대~60대 남성인 이유도 있다.

직장인들의 이용은 주로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이뤄진다. 그들은 중국 음식을 배달해놓고 당구에 진 사람이 이용요금 또는 음식값까지 계산하는 일명 ‘물리기 당구‘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또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퇴직한 노신사나 인근 상가 사장님이 친목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당구장을 찾고 있었다.

얼마 전 정년퇴임했다는 한 남성은 “경로당에 가기엔 아직 어리다”며 “머리와 몸을 움직여야 하는 당구처럼 일상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했다. 그가 ‘머리를 써야한다‘고 말한 이유는 당구공이 움직일 각을 머릿속에 그리고 계산해야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밉상인 상사를 공으로 생각해서 힘껏 밀어칠 때 ‘딱‘하고 나는 소리에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말하는 등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공통적인 생각은 “일상에서 쉽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편 당구는 공식 스포츠로 분류돼 세계대회를 시작으로 구청장배대회, 직장대항 대회 등이 개최되고 있다. 차우람 선수 등 여성도 당구계에 발을 디뎠다.
퇴근 시간쯤 당구장 모습. 자옥한 담배 연기는 없다. 손님으로 붐비지는 않았다.
■ 1997 당구장과 2017의 공통점은?
인식, 이용자층, 스포츠 분류 등 많은 변화 속에서도 지금껏 변함없이 이어져 오는 것들이 있다.

당구장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시설 그리고 ‘남성초과 공간’이란 점이 그렇다.
시설의 경우 젊은 감각의 인테리어와 스크린이 설치돼 카페식 분위기를 연출한 곳도 있지만, 다수는 1990년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있다면 건물 내 금연정책으로 흡연실이 생겨 당구대에 담배를 올려놔 흔적 만드는 일이 사라진 정도다.

또 일본식 당구용어 없이는 게임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만연해있는데, 예를 들어 ‘세워치기’ 등으로 말할 수 있지만 지금도 ’마세이‘가 표준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남성들의 도전과 성취 욕구를 자극하는 '마세이‘란 말은 프랑스어 ’마세(massé)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마세는 공이 당구대에 접근해 있거나 공과 공 사이가 좁아서 칠 수 없을 때 큐를 수직으로 세워서 공을 깎아 치는 방법을 말한다.

한편 ‘여성도 이용한다‘는 말이 들렸지만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은 주로 포켓볼을 즐긴다고 전해 들었다.
카페식으로 인테리어 한 당구장. 4구 및 포켓볼을 즐길 수 있다.
■ 노신사에게 도전장을 내민 기자... 결과는?
부장이 이 기사를 싫어하겠지만, 한가롭게 몸을 풀던 노신사에게 게임을 요청했다.

예상했지만 당구장에서 “나는 OOO 친다”라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당구를 즐기며 재미와 승부욕을 불태우기 위해 간단한 내기나 벌칙을 정하곤 하는데, 보통 자신의 실력을 낮춰 겸손함을 드러낸다.

노신사 역시 “못 친다”며 “젊은 사람 이길 수 있겠나. 게임비 내게 생겼다”고 말했지만, 게임에서 패한 후 당구장 사장이 “저분은 1000다마(점) 치는 분”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당구를 즐기며 재미와 승부욕을 불태우기 위해 간단한 벌칙을 정하곤 했다. 사진은 '머리박기' 벌칙. (사진= 커뮤니티 캡처)
서울시에 있는 몇몇 당구장을 돌며 시민들 모습을 보고, 그들과 대화하며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 중간에서 ‘낀 세대’로 불리는 40대~50대 남성들을 위한 공간과 즐길 거리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바쁘게 활동하며 시간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술과 담배를 대신할 우리 아빠들의 공간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동준 기자 blond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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