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전쟁으로 과부와 노인만 남은 지리산 자락 촌락. 시골에 발이 묶인 20대 과부 사월은 ‘이태 동안 서방 없이 살아도 아무렇지 않냐’며 독수공방을 한탄한다. 같은 처지의 점례 앞에 젊은 남성 규복이 나타난다. 빨치산에서 도망쳐왔다. ‘산송장’처럼 지내던 점례는 규복을 대나무 밭에 숨기고 정을 통한다. 이를 눈치 챈 사월이 반협박조로 말한다. ‘하루씩 번갈아 가며 그분을 돌봐주자.’
국립창극단 대형 신작 ‘산불’의 주역을 맡은 이소연(오른쪽)·류가양은 “각 인물의 산불 같은 마음을 봐달라”며 “음악도 대쪽처럼 타오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아래는 국립창극단 ‘산불’의 홍보 사진. 왼쪽부터 이소연·박성우·류가양. 국립극장 제공 |
‘산불’은 대대적 재단장을 앞둔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마지막 대형 창극이다. 광활한 무대를 활용한 장치들이 인상적이다. 1000그루 이상의 실제 대나무를 모아놓은 대숲, 실제 크기와 맞먹는 추락한 폭격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무엇보다 ‘산불’의 주인공은 여인들이다. 이념 대립 속에 살아남아야 하는 마을 여인들은 끝내 거대한 비극에 휩쓸린다. 사월이 성욕을 솔직히 드러내는 진취적 인물이라면, 점례는 얌전하고 순진하다. 이소연은 그러나 “보여지는 게 다를 뿐 점례도 욕망을 채우기는 마찬가지”라며 “이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동네 친구인 점례·사월처럼 이소연과 류가양도 인연이 깊다. 두 살 차인 이들은 같은 스승 아래 동문수학하던 사이다. 10여년 전 명창 송순섭 아래에서 “‘산공부’한다고 같이 산에 가서 연습은 안 하고 놀고 먹고 설거지·샤워도 같이 했다”며 “잘 까불고 놀았다”고 한다.
류가양은 “소연 언니가 확실히 주역 경험이 많아 (극을) 끌고 가는 편”이라며 “저는 아직 유치원생처럼 허덕이는데 공부 엄청 잘 하는 언니가 근의 공식을 알려주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러자 이소연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규복 역은 창극단 단원 김준수·박성우가 나눠 맡는다. 이들은 ‘산불’을 볼 관객에게 당부했다.
“극에서 거대한 산이 불타요. 각 인물들도 온갖 감정과 인생 자체가 확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들어 재가 돼버려요. 각 인물의 불타오르는 산불 같은 마음을 봐줬으면 좋겠어요.”
이 작품에서 기대되는 또 하나는 음악이다. 영화 ‘곡성’ ‘부산행’의 장영규가 음악감독을 맡았다. 이소연은 “음악이 심플하고 현대적이면서 꼬챙이처럼, 대나무처럼 타오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약간 실험적일 수 있지만 비워냄에서 오는 강렬함이 있다”는 게 류가양의 귀띔이다.
“이전처럼 슬플 땐 슬픈 곡조, 아름다울 땐 아름다운 곡조가 나오지 않아요. 엄청 생소해서, 배우들이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처음에는 어떻게 소화할지 난감했는데, 오히려 표현할 여지가 많은 것 같아요. 꽉꽉 채운 반주에서 탈피했고 고수·장단도 없어요. 그래서 사람이 노래하면 대쪽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대나무가 서 있는 듯한. 사람 목소리가 그렇게 보여져요. 새로운 창극이 나올 것 같아요.”(이소연)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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