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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이번엔 국민참여 개헌운동에 ‘총대’ 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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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9-29 20:50:28 수정 : 2017-10-01 12: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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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 헌법개정국민주권회의 대표 맡아 / 판사출신 인권변호사로 맹활약 / 3선 국회의원·참여정부 장관 지내
그는 ‘총대메기’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심지어 자신의 삶을 ‘총대의 연장’이라고 규정했다. 실제 그의 삶이 그랬다.

먼저 노동 전문 인권변호사 시절인 1987년. 그는 대우조선 이석규사건 당시 경찰이 운구차를 목적지와 다른 곳으로 빼돌리자 총대를 메고 항의하다가 구속됐다.

1988년엔 대선 패배 이후 열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운 평민당에 문동환 박사 등 많은 재야인사들을 끌어모으는 데 앞장섰다.

그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캠프에서 아무도 자금모금을 하지 않으려 하자 스스로 총대를 멨다가 2년 후 영어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상수(71) 전 노동부 장관 얘기다. 그는 판사 출신 인권변호사에서 3선 국회의원과 노동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하는 동안 자주 총대를 멨다고 회고했다.

그런 이 전 장관이 또다시 총대를 멨다. 지난해 말부터 유인태·박형준 전 의원과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 박영수 특별검사 등과 함께 대표로서 국민참여 개헌운동에 벌이고 나선 거다.

‘근로기준법’ ‘집단적 노동관계법’ 등 노동 관련 법학서가 가득한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28일 오전 그를 만났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총대메기의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 지난 28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개헌운동단체 ‘헌법개정국민주권회의’의 취지와 활동 등을 설명하고 있다. 사무실 벽 한편에는 총대를 잘 멘 삶을 다스리려는 듯 ‘군자는 조화롭되 휩쓸리지 않는다’는 의미의 ‘화이부류(和而不流)’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재문 기자
―요즘 ‘헌법개정국민주권회의’ 대표를 맡아 개헌운동을 벌인다는데.


“작년 9월쯤 정치상황이 새 변화를 추구하고 한편으론 권력구조 개편 논의가 시작돼 개헌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헌법 개정에 공감대가 있더라. 그래서 뜻맞는 사람들과 뭉쳐 헌법 개정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 회원은 차트 멤버만 150명 정도 된다. 서울과 경기, 강원, 충청, 전남 광주에 지역 조직이 결성됐고 대구와 전북, 부산 등도 준비 중이다. 활동가 양성을 위한 4주(8회)짜리 ‘개헌아카데미’도 운영 중인데, 1기 48명이 수료했다.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2, 3기를 진행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야당 지도자들도 모두 개헌을 약속하지 않았나.

“많은 사람들이 개헌 변곡점에 왔다고 낙관하는 분위기다. 대통령도 여러 차례 내년 6월 개헌하겠다고 했고 야당도 하겠다고 해서다. 하지만 비관적인 견해도 있다. 개헌 아킬레스건인 권력구조 개편에 합의가 안되면 어렵지 않겠느냐. 대통령은 기본권이나 지방분권 개헌이라도 하겠다는 의지이지만 야당은 권력구조 개편 없는 개헌은 의미 없다는 입장이어서 합의가 안 되면 개헌은 물건너가는 것 아닌가. 걱정이 많다. 정치권에만 맡기면 안되겠다 싶어 국민이 참여하는 개헌운동을 생각하게 된 거다.”

―문 대통령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 대통령은 개헌에 대한 의지,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좀더 유연성을 보일 여지가 있다. 우리는 권력구조를 흔들겠다는 게 아니다. 기본권 등 바로 시행할 수 있는 건 개헌 후 바로 하더라도 권력구조 개편은 시행시기를 5년 후로 미룰 수 있어 대통령에겐 아무런 부담이 없다. 대통령이 개헌에 앞장서면 우리 정치사에 큰 위업이 될 수 있다. 사실 민주당 내 일부 강경 분위기가 문제다. 이들은 4년 중임제 대통령제는 좋지만 분권형 개헌은 받지 않겠다는 기류가 강하다. 그들의 입장을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

―야당에 하고 싶은 말도 많을 텐데.


“야당은 현재 구도를 흔들기 위해 양보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선거법을 개정하면 분권형 개헌도 고려해보겠다고 했고 선거법이 개정되면 새 제도는 분권형에 친화적일 수 있다. 야당은 선거법에서 양보하고 대통령이나 여당도 분권형 개헌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한다면 합의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낙관적이진 않다고 했는데, 복안은 있는가.

“각 정당 모두 ‘국민참여 개헌’ ‘국민이 중심이 되는 개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국민을 참여시키는데 인색하다.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다. 정파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한계가 있다. 국민이 개헌안을 만들 때부터 참여해야 하고 공론화에도 나서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현재 △권력구조 개편 △기본권 중 사회적 기본권 확대 △지방분권에선 지방정부의 권력 확대 3가지 문제가 합의가 어려울 것이다. 3가지, 정 안된다면 권력구조 개편만이라도 국민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논의해 국민적 의견을 모으면 좋겠다. 10월말부터 공론화위를 꾸려 100일 정도 돌아가게 내년 2월까지는 한두 개의 아킬레스건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주요한 ‘성장 매듭’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여수공고를 나와 고대 법대 입학 △사법고시 합격 △노동 전문 변호사 활동 △정치권 입문 등을 꼽았다.

―여수공고 출신으로 고려대 법대에 들어가 화제가 됐는데.


“제가 공부를 꽤 잘했다(웃음). 사실 서울대 법대를 가려고 했지만, 공고에서 독일어를 가르치지 않아 제2외국어가 필수인 서울대에 2번 떨어져 고대에 진학했다. 그래도 우리 공고에서 고대 법대를 간 사람은 제가 처음이다. 저를 되돌아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는 사다리가 자꾸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1980년 광주지법 판사로 임관했지만 1982년 ‘횃불회’ 인사들의 영장기각 후 판사를 그만뒀는데.

“먼저 횃불회 등의 명칭은 정확한 게 아니다. 당시 안기부가 네 사람이 반국가단체를 만들었다며 검찰을 통해 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을 담당하는 날이었는데, 제가 보기엔 반국가단체가 아니었다. 영장 판사는 혼자 하는 것이고 역사에 남는 것이어서 고민하다가 4명 모두 영장을 기각했다. 안기부에서 경고를 하는 등 발칵 뒤집어졌다. 부장판사가 재청구된 영장을 발부하며 사건은 마무리됐지만, 전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됐다.”

이 전 장관은 이후 서울에서 ‘한국노동문제연구소’를 차리고 노동 쪽 인권 변론을 주로 맡았다. “한국 노동운동가 가운데 이상수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의 김문수 전 경기지사도 변론했다. 

―인권 변호사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역시 1986년 권인숙양 사건이다. 당시 이돈명 변호사가 전화해 ‘인천에 이상한 소문이 있는데 (교도소에) 가서 (권 양을) 접견하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인천 교도소를 찾아갔다. 먼저 같은 방에 있던 연대 출신 노동운동가를 접견해 ‘같은 방에 권 양이 있다는 데 맞느냐’고 물어보니까 ‘맞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후에 권 양을 접견하고 물어보니까 정말 그렇게 당했다고 말했다. 개인 프라이버시인데 밖에 알릴 것인지를 물어보니까 권 양은 용기 있게 알리라고 했다. 고 조용래 변호사 등과 함께 한번 더 권 양을 접견한 뒤 이 사건을 고발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전했다. 그는 “조 변호사가 고발장을 전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앞의 3분의 2는 제가 쓰고 나머지 결론 부분만 조 변호사가 썼다”고 말했다.

―1987년 대우조선의 이석규사건 대책위원장을 맡았다가 처음 구속된다.

“경남 옥포(대우조선소)에 내려가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더라. 둘이 1주일간 고생했고, 제가 재야 대표로 장례식을 치렀다. 노 전 대통령이 부산으로 떠나고 저만 남은 상황에서 광주 망월동으로 향하던 운구차를 경찰이 빼돌렸다. 그래서 누군가 항의해야 했는데, 다들 저만 쳐다봐 총대를 메고 경찰에 항의했다가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권유로 정치를 시작하는데.


“대선 패배로 김 전 대통령이 매우 어려울 때 제가 재야 사람들을 열심히 모아 ‘평민련(평화민주통일연구회)’을 만들어 평민당에 합류시켰다. 평민련을 만들 때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코피가 쏟아져 나오더라. 문동환 박사나 서경원 전 의원을 참여시켰고 이해찬 의원이나 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도 설득했다.”

―국회 입성 직후 노무현 이해찬 등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날렸는데.

“당시 노동위 멤버가 아주 쟁쟁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른바 ‘꼬마민주당’, 저와 이해찬 의원은 평민당 소속이었지만 당을 초월해 자료도 교환했다. 노동위가 열리면 포문을 열곤 했다. ‘이해찬은 면도칼처럼 저미고, 노무현은 송곳처럼 쑤시고, 저는 도끼처럼 쾅 치고’ 하는 식이었다.”

―대선자금 문제로 왜 다시 구속되느냐.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 캠프에서 정대철 선배가 선대위원장을 맡고 제가 사무총장을 맡았는데 돈을 어떻게 거둘 것인가로 고민했다. 아무도 돈 모으는 후원회장을 하지 않으려 했다. 3년치 당의 후원내역을 살펴보니 기업들이 이전에 내던 만큼만 내면 선거를 치를 수 있겠다고 생각해 후원회장을 맡았다. 열심히 했고 돈을 꽤 걷었다. 모두 140억원 정도 될텐데, 일부 영수증을 끊지 않고 돈 받은 게 화근이 됐다.”

이 전 장관은 결국 이 문제로 2004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2번째 구속 기소됐고, 항소심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참여정부 시절엔 열린우리당 창당에도 총대를 메는데.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구주류였던) 한화갑 대표나 이용태 사무총장이 자리를 비켜줘야 했는데 자리를 내놓지 않더라. 그래서 우리 내부에서 티격태격했다. 신주류인 ‘천신정’(천정배·신기남· 정동영 의원)은 한화갑과 굳이 우리가 타협할 필요가 있느냐며 새 당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고 노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신당 창당) 의지를 가졌다. 우리도 당을 깬 책임이 있지만 그쪽도 물러나지 않은 잘못이 있었던 거다.”

―2006년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문 대통령의 비정규직 해법이나 노동정책은 어떤가.

“대통령의 일반적인 정책 구상 방향은 상당히 옳다. 다만 방향이 옳다는 것과 실제 실행될 수 있느냐는 별개다. 현실은 4당 구조이고 국회선진화법이 있어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지난번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결정한 건 좀더 논의해 결정할 문제인데 조금 성급하게 접근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수제 민주주의의 패턴을 합의제 민주주의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됐다.”

―노동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노사가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 서로 양보하고 협의해 정말 대결단을 내려야 한다. 고용의 유연성과 고용의 안정성이 서로 배치되는 가치이지만 잘 조절하는 게 필요하고 가능하다. 헌법에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을 넣으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산업사회 노동관은 노동력을 팔고 사는 매매관계라고 보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제 서로 협력을 통해 상생하는 관계로 봐야 한다.”

―그 동안 경험한 대통령들을 평가한다면.


“정치가를 심대(深大)하냐 심소하냐 또는 담대(膽大)하냐 담소하냐의 2가지 측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치가에 있어서 '담'은 결단력 과단성 등을 의미하며 '심'은 소수자와 작은 것에도 세심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때 정치가의 이상형은 심소담대라고 하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담대하고 심대한 스타일이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담소하고 심소한 스타일이다. 노무현 역시 담대하고 심대한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은 심소하고 담대한 스타일 같다. 사실 처음엔 담대하지 않고 담소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인사 등을 보니 담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히 정치인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가.

“문 대통령은 우선 성품이 아주 바른 사람이다. 인간이란 자꾸 변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한 시점에서 고정적으로 평가해선 안된다. 문 대통령은 학습효과가 높은 사람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정치를 배우고 이제는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의 상당한 정치적 감각과 경륜도 쌓은 것 같다.”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이 임명됐는데.

“담대한 인사다. 사법부가 사실 내부로부터도 독립이 필요하다. 사법부가 상당히 보수화돼 있어 변화해야 한다. 변화하려면 확실한 개혁의지를 가진 수장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인사는 잘 한 것 같다.”

―앞으로 인생계획은.

“정치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선출직은 전혀 생각 없다. 헌법개정이 되면 물러서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여생을 마치려 한다. 다시 글을 쓰려 한다. 현대사로 내려올수록 증언이 별로 없는데, 자서전을 생생하게 쓰고 싶다.”

노동부 장관 시절보다 낫다는 그의 건강 비결은 1시간 정도의 아침 운동. 그는 거의 매일 오전 6시반쯤 아파트 단지 피트니스 센터에서 러닝머신 걷기(40분)와 근력운동(10분)을 한다고 한다.

김용출·배민영 기자 kimgija@segye.com

●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은

△전남 여수 출생(1946) △고려대 법학과 졸업(1973) △제20회 사법시험 합격(1978) △광주지방법원 판사 임관(1980) △13, 15, 16대 국회의원(서울 중랑갑) △새천년민주당 원내총무(2001) 및 사무총장(2003), 열린우리당 총무위원장(2003) 역임 △제22대 노동부 장관 역임(2006) △<사람값과 사람대접>(1997) <충무경찰서 초대가수>(2005)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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