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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닌 범죄 '데이트폭력'] '사랑싸움' 간주 면죄부 줘선 안 돼…명백한 범죄행위

입력 : 2017-09-20 06:00:00 수정 : 2017-09-19 22: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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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름 없이 맴도는 데이트 폭력/법적 정의부터 명확히 확립 필요성/ 피해자 보호 미흡 보복 범죄도 우려/ 주변에선 “맞을 만 해서…” 등 막말도/“가정사 취급 가정폭력도 인식 변화”/ 전문가, 다른 범죄와 구분 필요 강조
“웬만하면 두 분이서 화해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애인으로부터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A(26·여)씨는 지난해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다. 한밤중 남자친구 B씨와 다투다가 머리채를 잡히고 얼굴을 맞아 경찰을 찾았지만, 연인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경찰이 은연중 이같이 합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큰 상처 없이 멀쩡했기 때문일까. 고소할 엄두도 못내고 그대로 경찰서를 나온 A씨는 이후에도 B씨와 몇 차례 몸싸움 끝에 헤어지게 됐다.

데이트 폭력이 단지 연인 간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사례다. 데이트 폭력이 엄연한 범죄에 해당하는 데도 일반 형사사건과 동일한 잣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법조계와 학계 등에서는 데이트 폭력의 법적 정의가 명확하게 확립돼야 한다는 의견부터 오히려 가해자, 피해자의 특수한 관계를 부각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데이트 폭력’, 난해한 구분짓기

국내에서 데이트 폭력에 대한 정의는 아직 법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 지난해 박남춘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데이트 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는 데이트 폭력을 ‘데이트 관계에 있는 성인 또는 미성년자가 서로 간의 합의 없이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해를 끼칠 의도를 가지고 하는 신체적·정신적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여성계 등에서는 해당 법안이 명시한 데이트 폭력의 정의가 협소하고 다양한 관계에 놓인 피해자를 두루 보호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후 해당 법안이 19대 국회 종료로 자동 폐기되면서 데이트 폭력이 포괄할 수 있는 관계와 행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손문숙 활동가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의 정의에 대해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며 “흔히 데이트 폭력을 ‘이별 범죄’라고 부르며 이별 등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형태의 폭력범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최근 들어 파트너의 ‘통제 행동’ 등이 부각되는 등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가정에서의 폭력이 ‘가정사’ 정도로 취급됐지만 현재는 언어·신체·경제적 폭력을 아우르는 학대 행위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한 것처럼 데이트 폭력에 대한 통념도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에 따라서 변모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손 활동가는 “다만 데이트 폭력이 단순한 폭력 사건이 아니라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자가 상대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등 권력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데이트 폭력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은폐되거나 반복되기 쉽고 보복 범죄의 가능성이 크다는 특성이 있는 만큼 유사한 다른 범죄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가 데이트 폭력을 따로 떼어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피해자를 보호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상황을 반영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형법’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경범죄 처벌법’ 등으로 처벌하고 있지만 데이트 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근절 대책이 없다는 이유로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폭력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아”

‘데이트 폭력’을 분리해 처벌하는 것이 오히려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특수한 관계를 부각해 처벌을 감경할 만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폭력사건 가운데 유독 데이트 폭력 피해자에 ‘맞을 만 해서 맞았다’ ‘끼리끼리 만난다’ ‘맞았는데 왜 헤어지지 않았니’ 등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반응이 적지 않은 것은 범죄의 본질보다 관계의 특수성에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이은의 변호사는 “데이트 폭력이라고 따로 떼어 보지 말고 그 행위가 폭력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엄연한 폭력, 성폭력 사건에 굳이 ‘데이트’라는 단어를 붙일 이유는 없다”며 “파트너가 남들 보는 데서 폭언·욕설을 하면 모욕이나 협박에 해당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은 폭행에 해당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 변호사는 다만 “도덕적으로는 지탄의 대상이면서 법적으로는 처벌을 하지 않는 그런 폭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있는 법률을 보완하거나 강화하는 방법을 통해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는데도 굳이 새로운 특별법안을 만들자는 것은 ‘입법 낭비’이자 현장의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최근 대한의사협회가 표창원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 발의한 ‘데이트 폭력 방지법’에 난색을 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에는 데이트 폭력 피해를 인지한 의료인에게 신고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의사협회는 “범죄 피해의 판단은 의사가 아닌 사법부의 몫”이라고 선을 그었다. 또 “의료인이 데이트 폭력이 아닌 사안을 오인해 신고하거나 피해자가 신고를 원치 않는 상황일 경우 등이 불러 올 평판의 저하나 영업이익의 감소 등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 상당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데이트 폭력 방지’ 해외 사례는… 英 ‘클레어법’ 대표적

1999년 일본 사이타마현 오케가와시에서 한 여대생이 살해됐다. 전 남자친구와 그 형이 고용한 남자에 의해 살해된 이 사건은 ‘오케가와 스토커 살해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사건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피해 여성이 수차례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경찰의 대응이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비난이 빗발쳤다. 결국 이듬해 일본은 ‘스토커 행위 등의 규제 등에 관한 법률(스토커 규제법)’을 제정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잇따르는 데이트 폭력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보다 앞서 데이트 폭력 관련 법안을 마련한 해외 사례에 관심이 쏠린다.

대표적인 데이트 폭력 방지 법안으로 꼽히는 것은 ‘클레어법’으로 불리는 영국의 ‘가정폭력 정보공개 제도’다. 파트너의 가정폭력 전과 등을 조회할 수 있는 것이 골자인 이 법은 2009년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된 여성 클레어 우드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 파트너의 전과를 조회하기 위해서는 지역 경찰서를 찾아 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이후 면담·심사 과정을 통해 전과 조회 허용 여부가 결정된다.

일본은 2001년 ‘배우자 폭력 방지법’을 제정했고 2013년에 개정해 ‘법률혼·사실혼’으로 한정했던 범위를 ‘현재 동거 중이거나 동거했던 교제 상대’로 넓혀 해당 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이는 앞서 시행되고 있던 ‘스토커 규제법’과 상호보완 관계를 이루며 데이트 폭력의 사각지대 최소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역시 1990년 최초로 시행된 ‘스토킹 금지법’이 뼈대가 돼 발전한 ‘여성폭력방지법’으로 데이트 폭력 피해자를 폭넓게 보호하고 있다. 이 법은 데이트 폭력을 가정폭력, 성폭력 등과 함께 여성에 대한 폭력의 하나로 규정했다. 또한 대학 캠퍼스 내에서 발생하는 데이트 폭력 및 스토킹 등을 정확히 집계해 교육부에 매년 보고하여 예방·근절 정책 등을 마련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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