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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삽자루의 천민통신] (25) 잇단 여중생 폭력 사건… 누가 소녀를 악마로 키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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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9-17 10:16:44 수정 : 2017-09-17 10: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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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던 소녀들이 있었다. 알프스산에 사는 하이디는 마음이 따뜻한 소녀였다. 세상과 담을 쌓은 할아버지에게 삶의 의미을 느끼게 했던 기쁨과 행복의 소녀였다. 소공녀 세라는 부친의 부고와 함께 하루 아침에 무일푼이 됐다. 학교에 진 빚을 갚기 위해 하녀 신세가 됐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던 소녀였다.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에 시달렸던 신데렐라도 마음씨 고운 소녀였다. 화를 행하면 화를 당하고 복을 지으면 복을 받는 전형적인 교훈의 주인공이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은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마릴라 아줌마는 앤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아이라고 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명작 소설 속의 소녀들은 하나 같이 밝고 선하고 긍정적이었다. 행간마다 사회가 소녀들에게 바라는 모습이 투영됐다. 부모들은 그저 예쁘게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에 아낌 없이 지갑을 열었다. 소녀들은 어른들이 그린 밑그림에 각자의 꿈을 덧칠했다. 몇 해 더 자란 소녀들은 말괄량이 쌍동이, 플롯시, 다렐르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명랑 소설에 빠져들기도 했다. '발랄한 신입생'이 된 소녀들은 '꿈꾸는 데이트'를 기다렸다. 때로는 '배우지망생'이 때로는 '깜찍한 발레리나'가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사회가 바라는 틀을 바탕으로 소녀들은 스스로가 바라는 세상을 꾸며 나갔다. 소녀들은 그렇게 어른들이 구획한 부분집합 속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소녀들은 대체로 그렇게 자랐을 것이다. 굴러가는 가랑잎만 봐도 까르르 웃는 꼬마 아가씨로 커갔을 것이다. 적어도 남자가 회상하는 지난 추억 속의 소녀들은 그랬다. 


우리가 알고 있던 소녀들은 현실에 없었다. 처음엔 무릎을 꿇게 했다. 신발로 얼굴을 마구 밟았다. 분이 안 풀리자 쇠파이프 같은 걸로 머리를 내리 찍었다. 소주병으로도 내리쳤다. 병조각들이 잔인하게 흩어졌다. 단단한 음료수병을 들고 계속 머리를 가격했다. 머리가 먼저 깨지든지 병이 먼저 깨지든지 뭐가 하나 깨져야 끝날 것 같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피비린내가 나자 그 냄새가 좋다며 더 때리려 했다. 어짜피 살인미수이니 죽을 때까지 밟아버리겠다고도 했다. 남자를 불러줄테니 성관계를 하면 풀어준다고도 했다. 철골자재, 벽돌, 의자 등 가해자 주변에 있던 단단한 물건들은 모두 흉기가 됐다. 지옥 같은 1시간40분이 지나고 가해자들은 피범벅이 된 피해자의 모습이 기념물인냥 사진을 찍고 떠났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의 가해자들은 많아봐야 14살이었다. 문득 대학 때 가르쳤던 공부방 아이들이 떠오른다. 중학교 2학년들이 많았다. 남자 아이들은 끈 풀린 강아지 마냥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여자 아이들은 혼을 내거나 자신이 관심을 덜 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삐쳤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봐도 철문은 굳게 닫혔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줘야 풀렸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중2들은 초등 고학년과 다를바 없는 순둥이들이었다. 그들의 어린 생각에 귀기울이며 가르치는 보람을 잠시나마 느꼈었다.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벽돌을 들고 소주병을 들고 의자를 들고 사람을 팼다. 별 체격 차이 없는 한 살 어린 동생을 두들겨 팼다. 조폭 흉내를 내더라도 천성이 잔인해야 그렇게 때린다. 누가 소녀를 잔인한 악마로 키웠을까.

노컷V 캡처 화면

그즈음 또 하나의 무릎 꿇은 사연이 대중의 가슴을 쳤다.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토론회에서 엄마들이 무릎을 꿇었다.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것이 사회가 그녀들에게 던져준 죄였다. 제발 학교를 지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모들의 읍소에도 주민들은 냉소를 던졌다. 애초에 그 땅은 2013년 서울시교육청이 특수학교 부지로 공고한 곳이었다. 시교육청의 땅이기도 했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국립한방병원 설립을 들고 나온 건 정치인이었다. 선거 공약이 되자 주민들은 한방병원이 들어설 곳에 왜 특수학교를 지으려 하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왜 내 집값을 떨어뜨리려 하냐며 악다구니했다. 쇼를 하냐. 다른데로 가라. 강서구에 장애인이 왜 이렇게 많냐. 토론회에서 쏟아진 말들은 그들의 공감 능력과 공동체 의식을 의심할 만 했다. 금도를 잃었다. 금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자신들이 다른 이유로 장애아 부모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는 듯 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있다. 사람의 존엄보다 물질이 우선인 세상이다. 장애인학교를 혐오시설로 분류해버린다. 사는 격이 다르다며 공공서민아파트의 설립을 반대하기도 한다. 집값만의 문제이겠는가. 자신들보다 미숙한 이들을 하찮게 보는 의식의 발로겠다. 장애를 병균 취급하는 추악한 인종주의도 일부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가 사람을 차별하고 부족한 이들을 짓밟고 서려 하는데 자식이 도덕 교과서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보다 외모나 공부, 재산이 부족한 이들을 똑같이 손가락질하고 괴롭힐 것이다. 머리로 할 수 없다면 주먹을 쓰겠다. 혼자서 할 수 없다면 무리를 짓겠다. 쇠파이프로 때리고 벽돌과 소주병으로 머리를 내리 찍고 피투성이된 사람의 몸을 비웃을 것이다. 악마가 천사를 키우거나 천사에서 악마가 나오는 것은 드문 경우다. 대부분 악마를 키우는 것은 악마다. 특수학교가 없어져서 땅값이 올라도 필자는 그런 곳에 살지 않으려 한다. 집값은 비싸긴 하지만 아귀들만 가득한 아귀지옥, 아귀도(餓鬼道)처럼 느껴진다. 

하정호 기자 southcros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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