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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브람스를 듣기 좋은 계절 / 27살 때 작곡한 ‘현악6중주’와 58살 때 곡 ‘클라리넷 5중주’ 제격 / 2곡 듣고 나면 30년 세월 느껴져 올해는 추분이 9월 23일이라고 한다. 추분이 되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그 이후부터 밤이 길어진다. 낮에서 밤으로 시간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면서 여름에서 가을로의 계절 변화를 피부로 느끼는 시점이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처럼 같은 날씨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변화가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흘러간다. 그래서 왠지 가을은 빨리 지나간다. 가을이면 으레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한다. 어쩌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조용한 독서와 사색을 원하는지 모른다. 들뜬 여름을 가라앉히고 다소 무겁게 자리를 잡고 창 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음악 또한 그리워진다. 가을은 ‘음악의 계절’이기도 하다. 외국에서는 가을부터 새로운 연주회 시즌을 시작한다. 우리도 각종 음악회가 바쁘게 열리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가을의 음악으로 무엇을 들어볼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한 젊은이가 중년의 여인에게 묻는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중 한 대목이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프랑스 라디오 방송교향악단의 브람스 교향곡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보인다. 청년이 여인에게 데이트를 청하면서 교향악단의 연주회에 함께 가자며 하는 질문이 소설의 제목이 됐다. 그런데 그 질문에는 혹시 브람스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실려 있다. 사실 프랑스와 브람스는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는 풍요로운 자연의 나라이며 빛의 나라이다. 그래서 각종 농산물이 훌륭하고 음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반면 브람스가 태어난 독일과 그가 주로 활동한 빈은 그렇지 못하다. 프랑스가 낮의 나라라면 독일은 밤의 나라이다. 음악적으로도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과 비교하면 브람스의 음악은 많이 무겁다. 브람스의 작품에는 ‘헝가리 춤곡’과 ‘자장가’와 같이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음악도 있지만 그 반대가 훨씬 일반적이다.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음악학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가을 음악으로 브람스의 작품을 떠올린다. 묵직한 브람스의 음악과 함께 창이 잘 닫혀 외부의 소음이 차단된 창가에 앉아 좋아하는 차 한 잔을 곁들이며 바깥을 내다보는 맛은 일품이다. 날씨가 조금 흐리면 더 좋다. 너무 세지 않은 바람도 좋다. 단지 한낮은 피하기 바란다. 아직 좀 더울 수 있다. 특히 브람스 음악은 우리의 체감 온도를 높일 수도 있다. 이렇게 준비되면 브람스의 ‘현악6중주 1번’을 듣는다. 현악6중주는 현악4중주에 저음 현악기인 첼로와 비올라가 한 대씩 더해진 앙상블을 말한다. 그만큼 현악4중주에 비하면 저음이 강화돼 훨씬 무겁게 들리기 때문에 가을 분위기의 브람스 음악에 잘 어울리는 실내악 편성이다. 낮은 음역 대에 음들이 밀집해 있어서 뭔가 저 깊은 속에서 계속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빠르지 않지만 제법 격정적인 제1악장을 지나면 느린 두번째 악장이 이어진다. 제1악장은 첼로가 먼저 시작하더니 제2악장은 비올라가 주제 선율을 시작한다. 브람스의 저음 악기 편애 성향이 잘 드러난다. 경쾌한 그러나 가볍지 않은 제3악장을 마치고 나면 마지막 악장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도 제1악장과 마찬가지로 첼로가 먼저 주제 선율을 연주하고 바이올린이 그 선율을 받는다.

혹시 시간이 좀 더 흘러 낙엽이 떨어질 정도로 가을이 깊어 가면 브람스의 ‘클라리넷5중주’를 추천한다. 클라리넷과 현악4중주의 앙상블 곡인데 브람스가 죽기 6년 전인 쉰여덟 살 때 작곡한 완숙한 경지의 작품이다. 반면 현악6중주는 겨우 스물일곱 살 때의 곡이다. 청년 시절의 현악6중주와는 달리 클라리넷5중주는 음악이 그리 튀지 않고 선율과 리듬은 오히려 단순해졌으나 음악에는 원숙함이 배어 있다. 빠른 악장은 너무 빠르지 않고 느린 악장도 너무 느리지 않다. 절제의 균형이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두 곡을 듣고 나면 그 사이에 흐른 30년이라는 세월이 느껴진다. 나도 나의 지난 30년을 되돌아보고 싶다, 이 가을에.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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