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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고개 숙인 을의 설움, 사무치게 잘 알기에 비정규직 안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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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25 20:44:50 수정 : 2017-08-25 20: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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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소싱 업계 1위’ 삼구아이앤씨 구자관 책임대표사원
질곡 없는 인생이 없다고 하지만 그에게 젊은 날은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삶이 힘들었으면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꿈만 꿔도 자다가 벌떡 일어난다고 했을까. 그는 힘들 때 쌓였을지 모르는 분노와 화가 상대방에게 미칠까봐 직원 주례를 서지 않는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칠십을 넘긴 이제는 2만3000여명의 직원과 함께 글로벌 회사를 만들기 위해 큰 도약을 꿈꾸고 있다.

국내 최대 아웃소싱 전문회사인 삼구아이앤씨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을 21일 오후 서울 동작구에 있는 회사에서 만났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오륜서 경영학’ ‘헌법은 살아있다’ ‘청소의 기적’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자기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업계 1위를 굳게 지키고 있는 회사 대표의 사무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공간에서 눈에 띈 것은 ‘책임대표사원 구자관’이라 새겨진 명패였다.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은 21일 “성실과 신용을 무기로 모진 풍파를 헤친 끝에 직원 2만3000명의 업계 1위 회사를 만들었다”며 “삼구아이앤씨를 엑센츄어 같은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로 성장시켜 나가는 데 남은 인생을 걸겠다”고 말했다.
남정탁 기자
“사장이나 회장 대신 책임대표사원이라는 직함을 쓴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아마 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일 겁니다. 회사 내 직원들도 저를 그냥 ‘책임사원님’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명함에도 책임대표사원이라고만 적었어요.”

그는 책임대표사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업 초기 직원들이 용역을 맡긴 회사에 파견되면 주눅이 들어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고가의 물품이 망가지거나 깨지면 일하는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업계 관행 때문에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고객사의 집기가 부서지고 청소도구가 망가지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마음놓고 일하라’였다.

“직원들에게 ‘사무용품 등이 파손되거나 빗자루 등이 부러지면 내가 책임지겠다. 나는 단순한 회사 대표가 아니라 사원을 대표해서 모든 책임을 지려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공언했어요. 그 뒤부터 사장 대신 책임대표사원이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책임지는 대표사원이라고 전 직원에게 알린 뒤 실제 그대로 이행하면서 직원들의 업무 능률이 오르고 고객사로부터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창업한 지 4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삼구아이앤씨에서는 모든 책임을 최고경영자인 그가 진다. 직원들의 근무시간에 발생하는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맡은 일을 하면 된다는 의미다.

그의 회사는 연 매출액 9000억원 달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전국 1140군데 사업장에서 2만3000여명의 직원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다. 거래하는 고객사는 298개에 이른다. 부동의 업계 1위다. 오늘의 눈부신 성장 뒤에는 그의 눈물 젖은 젊은 시절이 버티고 있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월사금을 내지 못할 정도의 가난한 가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는 친구들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때 여름이면 ‘아이스케키’통을, 겨울에는 메밀묵통을 둘러메고 시장과 주택가 골목을 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에는 빗자루와 대걸레를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 미아리에 있는 집에서 새벽 4시에 자전거를 타고 구로구 문래동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도착하면 오전 9시였다. 이곳에서 엉켜서 쓰지 못하는 실을 구입해 자전거에 잔뜩 실고 공장으로 돌아오면 오후 4시가 되었다. 자전거 뒤에 실은 실의 무게 때문에 앞바퀴가 번쩍번쩍 들릴 정도였다. 어른 키보다 높게 실은 짐을 어깨로 받치면서 자전거를 끌고 돌아왔다.

일이 끝나면 그는 야간고등학교로 직행했다. 공장장은 학교에 가는 그를 야단치고, 때로는 뺨까지 때렸다. 그는 참고 다녔다. 당시 일자리는 귀한 데다 일할 사람은 천지에 넘쳐나고 있어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가난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마치고 청소까지 한 뒤 동대문에 있는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공장에서 등교할 때는 늦지 않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집에 갈 때는 돈을 아끼기 위해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집에 와서 씻고 잠자리에 누우면 자정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또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끌고 일터로 향했다. 매일 버스비를 아낀 돈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테스’ 등을 사서 틈틈이 읽었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군대를 제대한 후 청소업에 뛰어들었다. 별다른 기술과 큰돈 없이도 할 수 있는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은 평생 자신을 믿고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아내와 아주머니 2명이 전부였다. 삼구아이앤씨의 모태다. 지금은 미화, 시설관리, 생산, 제조, 골프장 시설관리, 특수경비 등 전문 아웃소싱 업체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 바지와 소매를 걷은 후 상처를 보여줬다. 다리는 물론 손부터 팔까지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1982년 청소에 쓰는 왁스를 직접 만들기 위해 솔벤트를 희석하는 도중에 불이 나면서 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지금도 겨울만 되면 상처가 갈라진다. 그는 영광의 상처라고 여긴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람, 신뢰, 신용을 갖추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 가지를 갖춘 회사라고 해서 사명도 삼구(三具)라고 지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삼구아이앤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약일까지는 일을 끝낸다는 신용을 갖고 있다. 고객사와의 두터운 신뢰는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탄탄한 성장은 직원을 믿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는 직원 월급을 단 하루라도 늦게 지급한 적이 없다. 한달 월급만 600억원이 지급되지만 직원과의 신뢰라는 생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월급 날은 꼭 지킨다. 이 때문에 6만개에 이르는 동종 업계에서 최고를 달리고 있다.

삼구아이앤씨의 큰 특징은 사업 초기부터 전 직원을 4대 보험과 퇴직금을 보장하는 정규직화했다는 점이다. 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운영하면 퇴직금과 보험료 등 20%의 지출을 줄일 수 있지만 그는 정규직을 고집했다. 청소와 경비 등 삼구아이앤씨의 주력 사업이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어서 비정규직 사원으로 운영해도 큰 문제는 없다. 오늘 배워 내일 근무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청소년 시절 공장에 다닐 때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온갖 설움을 겪었던 일이 생각나 직원을 도저히 비정규직으로 채용할 수 없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밤새 경비 서는 하찮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직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규직제를 시행하고 있다. 
삼구아이앤씨는 남자 직원은 ‘선생님’, 여자 직원은 ‘여사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본사 직원이 현장에 나가서 점검할 때도 아줌마나 아저씨로 부르는 일은 절대 없다. 아무리 사소한 청소일을 한다고 하지만 모두들 집에 돌아가면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버지, 어머니인 동시에 회사 성장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호칭을 부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도 현장에 나가면 꼭 직원들을 선생님과 여사님으로 부르며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한다.

삼구아이앤씨는 한번 거래를 트면 장기거래를 하는 것으로 업계에 정평이 나 있다. 변변한 인맥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일을 맡기면 제대로 해낸다는 평판이 이어지면서 장기계약을 하고 있다. 농심과는 1983년 13명의 직원으로 거래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1600명이 파견돼 일하고 있다. 신세계는 1992년 23명으로 시작해 현재는 4000명으로 늘었다. 1998년 54명으로 시작된 SK에는 현재 3000여명이 일하고 있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고객사 임원을 찾아가 일거리를 달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임원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직 성실과 신뢰, 신용으로 일궈낸 결과다. 일을 깔끔하게 잘해내자 고객사의 입소문으로 거래하는 회사가 점점 늘어났다. 일로써 승부를 본 것이 오늘의 회사를 만든 배경이다.

그는 고객사의 제품을 애용한다. 회사 방문객에게 전달하는 기념품도 라면, 과자 등 고객사의 대표상품을 담은 것이다. 그의 지갑에는 고객사의 제품 목록이 적힌 메모지가 들어있다. 작은 것이라도 꼭 고객사의 제품을 구매한다. 직원과 가족 등 10만명에 이르는 구성원에게도 고객사 제품 구매를 권유하고 있다. 고객사 발전이 회사 성장에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전에 2020년도 회사 매출액 목표를 1조원 달성으로 정했다. 그때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2년 정도 앞당긴 내년쯤 1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글로벌 아웃소싱 업체로 성장시키는 것이 그의 남은 목표다. 중국과 미국에 현지 법인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베트남과 멕시코에도 법인 설립을 진행 중이다.

그는 배움에 항상 목말라 있다. 환갑의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으며, 예순아홉에 석사학위를 취득했을 정도다. 또 쉰여섯에 스키를 배우고 예순에 번지점프, 예순다섯 살에 오토바이를 배워 전국을 누비며 활기찬 인생을 살고 있다. 직원을 하늘같이 모시는 남다른 경영관처럼 삶의 열정도 남다르다.

자수성가한 그는 시각장애인들의 의안수술을 돕는 후원회에 매달 후원금을 내고, 서울 남부구치소의 교정위원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직원에게 명함을 만들어 손수 전달할 정도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불우한 이웃을 보살필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이유다.

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

●구자관은

△1944년 서울 출생 △용인대 경찰행정학과·서강대 경제대학원 졸업 △삼구아이앤씨 대표이사 △용문중고 총동문회장 △동작복지재단 이사 △법무부 서울남부구치소 교정협의회장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07년 도산경영상 △2012년 지식경제부장관 표창장 △2013년 서울시 봉사상 △2015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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