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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시절에도… 삶의 흰 꽃 피워낸 ‘그때 그 사람들’

입력 : 2017-08-17 21:02:00 수정 : 2017-08-17 21: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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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경 장편 ‘저녁의 편도나무’ 출간 / 1980년대 치열한 노동현장 배경으로 사랑·상처·신념 등 삶의 모습 그려내 / 낮은 자리서 자기 몫 감당하는 사람들… 하찮아 보이지만 역사 일군 인생 조명 작금 한국문학에서 괄호 속에 갇힌 세월이 있다. 한국 현대사의 빼놓을 수 없는 ‘벽화’였던 1980년대 노동현장 이야기는 작단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불과 30년 안팎의 세월만으로도 문학적 가치가 사라지는 척박한 풍토 때문임은 두말할 것 없다. 폭압적인 군부독재 치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각 분야에서 분투하던 그 시절, 노동현장은 상징적인 용광로였다. 그 무대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운동’ 그 자체에 복무하는 논리와 정서여서 문학적으로 제대로 용해되기는 쉽지 않았다. 


초콜릿 공장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아낸 소설가 이후경. 그는 “역사의 조명이 비추어지지 않아도, 제 몫의 삶들을 꾸리다 나름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목숨들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곧 신의 존재 증명으로 느껴진다”고 썼다.
이후경 제공
2011년 김만중문학상을 받았지만 이제야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후경(57)의 ‘저녁의 편도나무’(별의별책)를 주목하는 배경이다. 이 작품은 ‘그 시절 그곳 사람들’을 호출하되 이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피가 돌고 살이 뜨거운 사람들 그 자체로 그려내는 미덕이 있다.

정석은 달콤한 초콜릿을 만드는 공장 ‘발렌타인제과’의 노동자다. 20대 초반. 쓸쓸하고 폐쇄적인 분위기의 이 남자를 여자들은 좋아한다. 같은 공장에 다니는 은희도 먼저 저돌적으로 정석에게 접근한 여자다. 정석이 그리 폐쇄적이고 어두운 이유는 누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황해도에서 피난 나오면서 자식 셋이 죽어나간 그의 부모는 남쪽에서 정석과 그의 누이 남매를 낳아 어려운 환경에서도 극진히 키웠건만 누이는 열네살 나이에 동생 뒷바라지하겠다고 다니던 봉제공장에서 불에 타 죽었다. 그 죽음의 과정이 끔찍하다. 공장주가 어린 노동자들이 물건을 빼돌릴까봐 밤에 그들의 숙소 문을 밖에서 잠그는 바람에 불이 나자 그들은 문을 절망적으로 긁어대다 까맣게 숯이 되어 죽었다.


정석에게 은희는 그 누이를 닮은 여자여서, 많은 여자가 그에게 다녀가도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은희에게만은 휘둘릴까 두려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빠져든다. 은희의 사연도 만만치 않다. 겉으로는 짐짓 쾌활하고 거친 척하지만 열아홉살 나이에 유부남을 만나 스물두 살 때까지 태중의 아이를 셋이나 지워야 했다. 이혼도 하지 못하고 애인에게서도 떠나지 못하는 한없이 여린 남자의 덫이었다. 은희는 그 설움을 가슴에 품은 채 정석을 만나면서는 짐짓 쾌활하다.

이들을 ‘노루 새끼들’처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박길자라는 여자. 삼십대의 이 여성은 남편의 출소를 기다리며 안양교도소 인근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허름한 술집을 꾸려간다. 발렌타인제과의 또다른 노동자 김영애. 그네의 본명은 윤진우이지만 이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스며든 학생운동 출신이다. 그네의 사연도 정석이나 은희, 길자들과 처지는 달라도 아픔의 밀도는 다르지 않다.

시대의 폭압과 맞서다 학교를 떠나야 했고 원치 않은 아이를 감옥에서 낳았고, 숨어다니며 헌신적이고 이성적인 동지와 한 뼘 사랑을 나누는 처지다. 이들 외에도 주변 노동자들과 여러 사람이 같이 사는 쪽방집 풍경과 정서를 작가는 생생한 세밀화로 공들여 그려낸다. 진우(영애)는 그 시절 어설프게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공단에 들어와 생채기만 내는 부류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제대로 공부한 것도, 무엇을 겪을 새도 없이 그대로 밀려나온 그들은 고통받고 무지하지만 미래의 주역인 노동자에 대해 터무니없이 신성한 경외감을 품고 있으리라. 흠모하던 연예인을 만난 소녀처럼 그녀의 눈은 빛났다. 잘 알고 있었다. 저 기대는 그렇게 환상적인 거라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삽시에 무너진다는 것을.”

노동자에 대한 환상을 품고 혁명의 디딤돌로만 단순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허구를 명쾌하게 지적하는 대목이다. 이후경이 그려내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목적이 앞선 대상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주어진 노동과 사랑의 몫을 감당해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오히려 더 강한 연민이 작동하는 캐릭터로 살아난다. 이들이 나누는 사랑의 세목들은 특정 시대와 공간을 떠나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보편적인 속성으로 다가온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 이후경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게 살다 떠나간 하찮은 사람들, 지금도 그렇게 살다 떠나갈 하찮은 사람들이 모여 역사를 그려냈다”면서 “그 하찮은 사람들이 모여 그리는 커다란 그림의 한 귀퉁이, 아주 작은 부분에 모인 사람들을 그려냈을 뿐”이라고 후기에 썼다. 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편도나무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신에 대해 말해 달라는 부탁에 스스로 활짝 피어난 편도나무의 하얀 꽃들이 내게는 곧 하찮은 그들”이라며 “그것도 환한 대낮이 아닌 저녁, 어두운 시절에 소리 없이 피었던 꽃들”이라고 부기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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