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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뒤 얻은 ‘하산의 지혜’… 백조처럼 아름답게 떠날 것”

입력 : 2017-08-13 20:56:42 수정 : 2017-08-14 01: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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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영철 “현역 무용수에서 조금씩 내려와야 하는 나이가 됐는데,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는데 속으로 많이 전전긍긍했죠.”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영철(39)은 지난 1년간 긴 터널을 헤쳐왔다. 40대가 코앞이었다. 발레리노로서 슬슬 내리막길을 준비해야 했다. 무용수의 숙명이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배역도 옛날에는 무조건 수석무용수로서 자리가 나왔다면 이제는 한두 개씩 동생들에게 양보해야 했다”며 “1년여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가 이런 경험을 안무에 담았다. 지난 주말 국립발레단 안무가 육성 사업인 ‘KNB무브먼트 시리즈3’에서 선보인 ‘미운오리새끼’를 통해서다. 공연을 앞두고 서울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영철을 만났다. 힘든 시간 뒤 그가 얻은 건 하산하는 자의 지혜였다.

“혼자 속으로 아파하는 와중에, 발레단 후배나 선생님, 팬들이 제 눈치를 보는 게 보이더라고요. 저를 위로해주고 싶은데 함부로 나서지 못했던 거겠죠. 그것조차도 가슴 아프더라고요. 편하게 대하면 될 텐데. ‘이번에 출연 안 해, 다른 역할 해’ 하면 친구들도 괜히 민망해했어요. 생각해보면 그런 일련의 과정이 저한테 필요했고, 저를 더 강하게 만들지 않았나. 어느 순간 (내려와야 함을) 스스로 인정하게 됐어요. 마음도 몸도 굉장히 성숙해진 걸 느껴요. 이 이야기를 춤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2015년 ‘빈집’을 시작으로 네 번째 작품인 ‘미운오리새끼’를 안무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영철은 “안무는 아직까지 저한테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라며 “그래도 무대에서 그간 고생한 게 잘 결실하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작은 사진은 이영철의 안무작 ‘더피아노’가 이달 초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 ‘댄스 인투 더 뮤직’ 공연 당시 모습.
국립발레단 제공
안무를 구상하던 중 미운 오리 새끼가 떠올랐다. 그의 춤 인생은 미운 오리의 날갯짓과 비슷했다. 그는 고교 시절 백업 댄서였다. 1990년대 가수 육각수와 비비 뒤에서 춤췄다. 그러다 세종대 무용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8개월 준비해서 시험봤다”며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이고 제가 너무 못했음에도 (대학) 선생님들이 가능성을 보고 뽑아줬다”고 회상했다. 그는 “입학시험 날 다른 지원자들이 너무 잘해서 의자에서 일어서지를 못했다”며 “그들을 보며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했다. ‘동기들의 상대도 안 된’ 미운 오리였던 그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콩쿠르 수상까지 하며 날개를 펴자 질투도 받았다. 이 시절 모습은 ‘미운오리새끼’의 1장 ‘어글리 덕’에 표현했다. 2장은 화려한 무대 생활, 3장은 ‘다잉 스완’ 즉 죽어가는 백조다.

“백조는 죽어가지만 아름답잖아요. 정상에 있을 때 멋지게 사라질 수도 있지만, 아름답게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구나 싶었어요. 무대에서 멋있게 보이는 것만 어려운 줄 알았는데 잘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에게 또 다른 영감을 준 건 같은 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다. 그는 “슬기가 2007년쯤 ‘호두까기인형’ 주역으로 데뷔했는데 제가 수석무용수로서 이끌어주는 역할이었다”며 “그러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슬기랑 항상 파트너를 하게 됐다”고 했다.

“같이 무대를 잘 만들어 왔어요. 친동생 같기도, 가족 같기도 하고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았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무대에서 슬기가 다른 파트너를 만나니까 조금씩 서운해지더라고요. 나보다 다른 파트너와 잘 맞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들었어요. 예전에는 자존심이 있어서 이런 말을 못했어요. 다 내려놓고 한 발짝 떨어지니 얘기할 수 있게 됐죠. 슬기가 커가는 과정을 함께하다 결국 떠나보내는 모습도 안무에 담았어요.”

그는 요즘 “제가 경험한 아픔을 어떻게 하면 후배들은 덜 겪을까 많이 생각한다”고 했다. 발레단에서 행동도 조심스러워졌다. ‘영철이형도 아무렇지 않게 해냈지’ 떠올리면 좀 힘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는 미래에 언젠가 현역에서 내려와야 할 후배들에게 ‘상황을 직면하라’고 조언했다.

“아픔을 충분히 느끼는 게 인생에 도움되지 않을까 해요. 저 스스로 상황을 마주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걸 느끼지 않았을까. 도피하거나 모른 체하는 건 오히려 안 좋을 것 같아요.”

힘든 시기를 견디게 한 또 다른 힘은 안무였다. 그는 이달에 세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미운오리새끼’ 외에도 지난해 초연한 ‘더 피아노’와 ‘3.5’를 4∼6일 라이브 음악과 함께 공연했다. 그러다 보니 4, 5월부터 지금까지 주말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는 “여름 휴가 3주 동안 연습실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았다”며 “경비 분들이 저보고 징그럽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웃었다. 공연 뒤풀이 때조차 밤 9시에 슬그머니 일어나 연습실로 왔다. 힘들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한 가지 걱정이라면 ‘미운오리새끼’ 공연까지 끝나고 나면 굉장히 공허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라고 했다.

그가 현역에서 물러날 시기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는 “언제가 됐든 이 정도 작품에 이 역할이면 기억에 남겠다 하는 모습으로 은퇴하고 싶다”고 한다. 마음속 은퇴작으로 꼽는 작품도 세 개 있다. 케네스 맥밀란의 ‘마농’, 보리스 에이프만의 ‘차이콥스키’,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신부 역할이다. 무대를 떠나더라도 발레 인생은 이어갈 생각이다.

“발레 하는 게 너무 행복하고 발레를 너무도 사랑해요. 안무든 지도하는 일이든 계속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더 부지런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 중입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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