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 국면을 직접 배경으로 선택한 조해진의 ‘빛의 온도’는 아프고 따스하다. 화자의 아버지는 남의 나라 전쟁에 돌아온 지 10년째부터 피부가 곪고 종기가 나고 잇몸이 무너지는 후유증을 앓기 시작한 인물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이를 설정한 것인데, 이들이 ‘고엽제전우회’를 결성해 활동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화자인 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진 지 오래고, 아버지는 홀로 연금에 의지해 독거노인으로 살아가는 처지. 딸은 촛불시위 현장에서 우연히 그 아버지를 목격하고 뒤를 따르다 놓치고 만다. 딸은 시청 쪽 군중과 합류하는 캐릭터이고, 아버지는 광화문 태극기 시위대 쪽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딸의 독백, 아니 작가 조해진의 이런 마지막 지문은 이념과 주장의 차이를 떠나 모든 이들을 희미한 온기로 감싼다.
“촛불을 따라 그저 하염없이 걷다 보면 모두가 공평하게 웃고 아무도 상처 받지 않는 곳이 나올 것만 같았다. 피곤한 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시청이 아니라 광화문 쪽에 있었다는 것이 떠올라서인지, 아니면 나를 둘러싼 온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빛이 일렁였다. 빛의 온도, 이제 나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촛불이나 탄핵을 떠나 이 시대 청년 실업자 삶의 단면을 잡아낸 김금희의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에는 무어라 한마디로 집어내기 힘든 페이소스가 깔려있다. 보도의 노점도 시간대별로 사용자가 다르거니와, 아침 시간대에 잠깐 김밥을 파는 포장마차가 배경이다. 여자는 이곳에서 자신처럼 단골로 들르는 남자를 접한다. 포장마차가 사라진 후 햄버거 가게에서 우연히 다시 본 남자에 대해 그녀가 홀로 되뇌는 생각은 헛헛하다. “어떤 날에는 모든 것이 괜찮고 제대로인 듯하지만 어떤 날에는 반만 그렇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불행히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그것이 그의 흔한 아침인 걸까.”
임현의 표제작 ‘이해 없이 당분간’은 시류와 상관없는 사랑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에서 이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이야기 속 가난한 남자는 데이트를 주로 버스 안에서 했다. “우리는 너무 덥거나 추워서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날, 주로 맨 뒷자리에 앉아서 멀리까지 갔다가 승차한 곳에서 도로 내리고는 했다. 두 바퀴씩 돌기도 했다.” 그들이 공동의 미래를 계획한 곳도 대부분 버스 안이었다.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보니, 여자가 버스를 좋아한 게 아니라 내 처지를 배려한 것이었다. 그녀와 같이 타던 노선 버스를 애써 외면하다가 어느날 훌쩍 타버렸는데, 울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나뿐인 승객인 그를 태우고 버스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노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아저씨와 나 둘뿐이고,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따로 또 함께 울고 있었다.”
‘짧아도 괜찮아’ 첫 번째 시리즈로 나온 이 책에는 이밖에도 손보미 임승훈 김남숙 송지현 정용준 김덕희 오수연 조수경 김연희 이시백 조해일 김종옥 이연희 박솔뫼 최정화 백가흠 한창훈 백민석이 작품을 실었다. 평론가 신형철은 “소설 읽기란 증강된 진실로 쾌적한 독단을 치료하는 일”이라면서 “절망의 시대에 그런 것만큼, 희망의 시대일 때도 역시 그렇다”고 책 뒤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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