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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삽자루의 천민통신] (21) 최저인생은 보장해야 최저임금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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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13 08:00:00 수정 : 2017-08-09 14: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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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만원. 군복을 벗고 처음으로 쥐었던 거금이다. 예비역 병장은 돈을 벌어야 했다. 복학을 앞두고 등록금이 필요했다. '엄마론(loan)'은 굳게 자물쇠를 닫아걸었다. 앞가림을 하는 것이 철든 군필자의 모습이라 믿고 계셨다. 먼저 철이 든 동생이 생활정보지에서 이곳저곳을 골라줬다. 서비스업에 두기에는 외모가, 공사판으로 보내기에는 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동생은 주유소를 추천했다. 숫기 없는 형을 위해 몇 곳에 전화를 해주기도 했다. 기름냄새를 맡으며 한 달의 찬 겨울을 보낸 후에 월급을 받았다. 소장님은 만원짜리로 봉투 가득 130장을 넣어줬다. 하루 12시간씩 주6일을 일하고 받은 돈이다. 생애 처음 번 100만원 이상의 돈이었다. 흘릴까 걱정 되서 점퍼 안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채웠다. 혹시 몰라 가슴 한쪽에 손을 대고 계속 봉투를 확인했다. 누가 뺏어갈까 겁이 나기도 했다. 무사히 도착하니 '엄마론(loan)'에서 먼저 반겼다. 월급을 탔으니 키워준 보람을 하라 했다. 구두값 20만원과 보일러 기름 한 드럼을 넣는 선에서 협상이 마무리 됐다. 세 달을 일하며 용돈 쓰고 '엄마론(loan)'에 상환하고 등록금을 내니 빈털터리가 됐다. 전화기를 눌렀다. 소장님 주말 아르바이트 자리 없습니까?

6470원. 올해 최저임금이다. 지난달 기준으로 법정근로시간과 주5일을 준수했을 때 168시간을 일하게 된다. 최저임금으로 108만6960원을 받게 된다. 계산하기 좋게 108만원이라 하자. 월세 36만원(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 평균 수준)에 공과금을 보태면 주거비가 40만원 정도 든다. 5000원짜리 식사를 세끼 챙겨먹으면 46만5000원이 든다. 만들어 먹어도 비슷하겠다. 먹고 자는 데만 쓰는 돈이 86만5000원이다. 최소한의 잠자리와 최저가의 식사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해야 그 정도 든다. 출퇴근도 해야 하니 10만원 정도 교통비가 필요하다. 제외하면 손에 쥐는 건 11만5000원이 전부다. 이 돈으로 휴대폰 요금도 내야 하고, 연인이 있는 사람은 데이트도 해야 한다. 학업에 한창인 사람은 교재도 사서 봐야 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토익학원이라도 다녀야 한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금액이다. 쪼개 쓸래야 쪼개 쓸 수도 없는 돈이다. 있는 사람은 우습게 쓰는 돈인데, 없는 사람에게는 눈물나는 돈이다. 식사를 줄이거나 남의 집에 신세를 지지 않고서는 절대 미래를 준비할 수 없는 돈이다. 108만원이 남긴 건 108번뇌뿐이다.

17만8080원.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을 적용하면 늘어나는 돈이다. 여윳돈이 30만40원이 됐다. 계산하기 편하게 30만원이라 하자. 휴대폰 요금을 내고 연인과 극장 데이트를 하고 저렴한 학원을 다닐 여력이 생겼다. 앞만 보고 간신히 현재만을 위해 살다가, 미래를 준비할 작은 여유가 생긴 것이다. 최저임금이 1만원이 되면 71만5000원으로 크게 는다. 연인과 분위기 있는 양식당에서 호기를 부릴 수 있겠다.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잘 가르친다는 학원에 등록할 수도 있다. 서점에서 책 몇 권 사볼 수도 있겠다. 기능인이 꿈이라면 실습도구를 살 수도 있다. 정말 아껴쓰면 한 달에 50만원 정도 저축도 가능하다. 일년 모으면 600만원이다. 수년 더 모으면 단칸방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가게를 차리는데 보탤 수도 있다. 물론 모든 학자금은 대출로 충당하는 것이 기본 가정이다. 더 여유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몇 가지 더 요구되는 것들이 있다. 최저임금을 뛰어넘는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필요 조건이 붙는다. 결혼이나 출산 계획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충분 조건도 있다. 108만원이 168만원이 돼도 108번뇌는 멈추지 않았다. 168만원이 남긴 건 언젠가 최저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겠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싸고 말이 많았다. 비용 상승을 겁내는 상공층들이 하소연하고 있다. 현실은 부부가 일하고 바쁠 때 어린 자녀가 돕는 영세 소상공인들이 더 많다. 인건비가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겠다. 자영업 과잉 시대다. 창업이 줄어들면 경쟁도 줄어들겠다. 장벽을 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일자리 대책을 서둘러 논의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도전정신 쇠퇴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타'를 보며 하는 소리다. 초고령화 사회가 된 일본은 젊은 인력 구하기가 별따기다. 아전인수 격으로 자료를 가져다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협상 무용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논란만 불러일으키고 정부 뜻대로 결정되니 적지 않은 이들이 의문을 가진다. 이 기회에 시스템화하면 어떨까. 너무 빈곤하지 않는 주거와 영양 조건, 필수 생필품과 최소한의 교우 및 문화여가활동을 위한 비용을 수치로 만드는 것이다. 가령 집주인들이 월세를 올리면 그 인상분이 적용돼 저절로 최저임금이 오르는 것이다. 반기에 한 번씩 계산된 수치만 고시하면 끝나겠다. 지역 데이터를 활용해 지자체 사정에 맞는 최저임금을 제시할 수도 있겠다. 상하한폭을 정해 지자체가 정치적 판단으로 소폭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 더 좋겠다. 포퓰리즘 타령이 줄어들테니 말이다. 방금 기쁜 소식이 들려 왔다. 산업 전반의 물가 인하 움직임으로 인해 내년도 최저임금이 줄어든다고 한다. 물론 가상이다. 오르면 올라가야 하고 내리면 내려가야 한다. 하도 말이 시끄러워서 인간미 없는 계산기 세상을 상상해봤다. 

하정호 기자 southcros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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