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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인이 일왕에게 전쟁 책임 추궁하다

입력 : 2017-05-20 03:00:00 수정 : 2017-05-20 01: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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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패전후 귀환한 병사가 쓴 일기 / 개전 선언 일왕 책임 회피에 배신감과 분노 / “무엇이 잘못됐나” 스스로에 물음 던지며 신격화 교육 받고 자란 일본인의 자각 담아 / 軍서 받은 모든 것 반환하며 일왕에게 편지 / “이로써 나는 당신에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와타나베 기요시 지음/글항아리/1만8000원
산산조각 난 신/와타나베 기요시 지음/글항아리/1만8000원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일왕의 명령에 따라 16살의 나이로 입대했던 와타나베 기요시(1925∼1981)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은 와타나베는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빠졌다.

일왕제의 굳은 신봉자였던 와타나베는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황은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 중에도 다른 군인들이 가는 군인 위안소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기왕 천황 폐하께 바친 몸이니 깨끗한 채로 산화하는 것이 더욱 영광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전쟁이 끝난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와타나베는 패전 후 일왕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질 것으로 믿었다. 전쟁은 일왕의 어명으로 시작해 어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내놓은 만큼 일왕 스스로가 자결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 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심지어 적장인 맥아더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와타나베는 “나의 천황 폐하는 죽었다”며 절규했다. 

1945년 9월 도쿄 미대사관에서 만난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왕의 모습. 히로히토가 맥아더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본 저자 와타나베는 “나의 천황 폐하는 이날 죽었다”며 절규했다.
글항아리 제공
신간 ‘산산조각 난 신’은 일왕에 대한 신격화 교육을 받고 자란 일본인이 전후 책임을 회피하는 일왕의 모습을 보고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책이다. 책은 와타나베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쓴 일기를 묶었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책들은 주로 전문 연구가들의 책이지만 와타나베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일왕의 책임을 추궁했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와타나베는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도 수없이 질문을 던졌다. ‘천황은 자기 손으로 개전 선언에 서명을 했으면서도, 어째서 책임을 지지 않는가.’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던 국민을 배신하고, 하루아침에 적장에게 예를 표할 수 있는가.’ 이윽고 일왕을 ‘사람의 모습을 한 신’으로 가르친 교사와 입대를 부추긴 지식인들을 보고도 분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와타나베는 사촌으로부터 “천황을 그토록 철저히 믿었던 너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이내 일왕을 광신적으로 믿었던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성한다.

그는 일왕에 대한 일방적인 배신감에서 벗어나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일본의 전쟁에 대한 책임에는 일왕뿐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왕의 막대한 재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 전쟁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일왕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 일왕의 전쟁 책임에 대해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하는 언론에도 문제가 있음을 자각한다.

그는 일왕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삶에서 일왕과의 유대를 끊기에 이른다. 1946년 4월20일 일왕을 ‘당신’으로 호칭한 편지에서 “당신을 더는 믿을 수 없고 당신의 병사였던 지금까지의 인연을 끊고자 당신에게서 받은 금품을 돌려준다”고 적었다. 약 4년4개월간 해군에서 생활하며 받은 봉급과 식비, 피복류, 일왕의 하사품으로 받은 담배 3갑과 청주 1병까지 모두 돈으로 환산해 4282엔을 우편으로 함께 보낸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선언한다.

“나는 이로써 당신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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