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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설계한 정도전, 재상의 나라 꿈꿨다

입력 : 2017-05-05 09:00:00 수정 : 2017-05-06 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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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으로 본 경복궁 / 경복궁의 중심 건물 ‘근정전’ 이름 ‘정치를 부지런히하라’ 의미 담겨 / ‘사정전’은 생각하는 정치 하라는 뜻 / 근정문서 왕실의 주요행사 치러 / 자질 부족한 세습 임금 대신해서 / 재상이 실권갖고 국가경영 추구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경복궁의 전각과 궁성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렇듯 경복궁의 역사를 모르고는 조선을 알 수 없다. 최동군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 쓴 책 ‘경복궁 실록으로 읽다’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경복궁의 역사적 사건과 의미를 살펴본다. 

경복궁은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1394년(태조 3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완성했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경복궁의 전각과 궁성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의미가 깃들어 있다.
담디출판사 제공
◆‘재상의 국가’ 꿈꿨던 정도전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전의 지위를 갖고 있다. 경복궁 내에서 유일한 중층 건축물이자,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근정전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이름의 뜻을 보면 정도전이 품고 있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정도전이 꿈꾸었던 조선은 ‘재상의 나라’였다. 왕조국가는 임금이 세습되는 직책이기에, 자질이 부족한 임금이 나올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러한 폐해를 막기 위해 훌륭한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재상이 위로는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을 잘 이끌어 튼튼한 국가를 경영하게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금은 상징적인 존재로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재상이 이끌게 된다. 오늘날의 정치체계로는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정도전의 생각은 경복궁 내의 전각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경복궁에는 정전과 편전으로 근정전과 사정전(思政殿)이 있다. 근정전은 ‘임금이 정치를 부지런히 하라’는 의미를, 사정전은 ‘생각을 하면서 정치를 하라’는 뜻을 지닌다. 제2의 궁궐인 창덕궁에서 인정전(仁政殿)과 명정전(明政殿)이 ‘임금이 어진’, ‘밝은 정치를 하라’는 뜻을 지닌 것과 대조적이다. 창덕궁의 전각들은 임금이 주도하는 정치를 그린다면, 경복궁은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배워가며 정치를 하라는 의미가 깃든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생각은 태조실록에서도 드러난다. 정도전은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라고 말하여 임금이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단종은 근정문, 세조는 근정전

‘부지런히 정치를 하라’는 뜻의 근정문은 법전인 근정전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는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다. 인정전의 인정문, 명전전의 명정문, 숭정전(崇政殿)의 숭정문 등 법전의 정문 이름은 한곁같이 법전의 이름을 따른다. 이는 중국의 자금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태화전(太和殿)의 정문은 태화문이다.

법전으로 향하는 정문에서도 왕실의 주요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세조와 세종은 근정문이 아닌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이 같은 차이는 즉위의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의 예법대로라면 왕위 승계가 일어날 때 즉위식은 근정문에서 해야 한다. 이는 당대 즉위식이 경사스러운 예식인 ‘가례(嘉禮)’가 아닌, 국장을 다루는 ‘흉례(凶禮)’에 속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근정문에서 즉위한 왕이 단종뿐이었다. 태조의 경우 즉위 당시 경복궁이 아닌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정종과 태종, 세종은 선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선위를 받아 즉위했기 때문에 ‘흉례’를 따르지 않았다. 세종까지는 단 한 명도 선왕의 국상을 치르면서 즉위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선왕이 승하한 뒤 즉위했지만, 근정문에서 즉위하지 않았다. 문종은 궁궐이 아닌 막냇동생 영응대군의 집에서 즉위했는데, 세종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했기 때문이다. 문종은 빈전이 차려진 영응대군의 집에서 국상을 치르고, 동시에 즉위식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이 즉위 2년3개월 만에 승하하면서 그 뒤를 이은 단종이 조선 최초로 궐내에서 사위(嗣位·임금 자리를 이어받음) 의식을 치렀고, 근정전에서 즉위하게 됐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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