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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시간, 잘 견뎠다… ‘호구같은 삶’에 보내는 위로

입력 : 2017-04-27 19:58:41 수정 : 2017-04-27 19: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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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신작 장편 ‘뜻 밖의 生’ ‘뜻밖의’ 생이 있다. 가족관계가 뜻밖이고 세상으로부터 받는 대접이 모두 뜻밖이다. 소문난 타짜인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휘두를 뿐만 아니라 아들 또한 그에게는 단순한 이용가치밖에 없다. 어머니라고 아들을 일반적인 모성으로 거두는 건 아니다. 무당집에만 드나들며 아들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이 아들은 설상가상으로 키가 작은 왼손잡이다. 또래들도 귀신같이 그가 가정에서도 외면당하는 가난한 처지라는 걸 알고 따돌린다. 이 아들은 이름조차 어수룩하게 이용만 당한다는 의미의 ‘호구’다, 박호구.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인물의 전형인 셈이다.

청송객주문학관에서 세 번의 겨울을 나며 장편 ‘뜻밖의 생’을 완성한 소설가 김주영. 그는 “기실 우리 모두의 생은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뜻밖인 건 없다”면서 “낮은 곳 추운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위로를 받기 바란다”고 밝혔다.
남정탁 기자
박호구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기르는 대상도 있기는 한데 그 존재는 사람이 아닌 똥개 ‘칠칠이’다. 김주영(78) 신작 장편 ‘뜻밖의 生’(문학동네)에는 ‘사람 같은 개’ 칠칠이와 박호구, 이들을 둘러싼 군상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가장 낮은 곳의 존재들에게 희망을, 위로를 주기 위해 쓴 소설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객주’ 전9권 완간(2013년) 이후 4년 만에 내는 장편이다. 팔순을 목전에 둔 나이에 장편을, 그것도 깊은 연륜으로 길어낸 인생의 지혜를 공들인 문장에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이 나이에 신간을 낸다는 게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물레방아는 축이 튼튼해야 잘 돌아가는데, 이 물레방아는 축이 닳아서 삐걱거립니다. 그래도 이 나이가 되도록 써야하는 배경에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주제나 소재로 삼든 최종 목표는 그 작품을 읽는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사람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게 내 꿈입니다.”

노경에도 쉬지 않고 근면하게 글밭을 일구어 새 장편을 상재한 김주영은 지난 26일 기자들과 만나 자신이 문학을 붙들고 지금까지 달려온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이번에 펴낸 장편은 ‘호구’로 멸시당하며 세상을 살아온 노인이 동해 포구의 안개 낀 노상에서 화톳불을 앞에 두고 젊은 매춘부와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 여자 최윤서와 박호구, 생의 ‘난민’들이 나누는 대화는 긴 이야기의 해설을 맡는 막간극처럼 삽입된다. 이들이 말미에 함께 찾아 나서기로 한 ‘당나귀’의 실체는 ‘아낌없이 주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이 세상 어디엔가는 반드시 존재할 느꺼운 사랑이다. 그 당나귀는 정작 본질만큼은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덩치 큰 개’ 칠칠이로 상징된다.

칠칠이는 호구가 곡예단 단장 강기찬의 매질에 피를 흘리자 달려들어 단장을 물어뜯은 뒤 달아났다. 그 전에는 터미널에서 노숙하며 먹을 것들을 훔쳐와 호구를 먹여 살리기도 했다. 늙은 호구는 포구의 안개 속에서 회상한다. “칠칠이와 나 사이에는 이별도 죽음도 없어. 나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에도 칠칠이의 울음소리가 확연하게 들려. 바닷가 파도 위에도 칠칠이가 남긴 그림자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것이 확실하게 보이거든. 내가 세상에 깔려 있는 깨진 유리창 위를 걷고 있을 때는 항상 칠칠이의 울음소리를 듣곤 했지. 그래서 내 발바닥에 상처 따위는 없었어. 그런 행복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나는 얼음장 위에 집을 지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어. 이깟 노숙생활도 그래서 내겐 아무것도 아냐.”

불우하지만 욕망이 승한 ‘단심이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교활한 곡예단장, 색소폰 연주자, 시계수리공들이 호구와 칠칠이 주변의 막장 인생들이다. 신분증이 없어 강제징집을 당하지만 정작 군에서야말로 역설적으로 키 작은 그는 차별받지 않았고, 막판에는 ‘뱁새 둥지에서 뻐꾸기 새끼를 기른’ 호구가 이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 물경 16년을 살다 나오지만 그는 이제 해탈한 모양새다.

“난 지옥은 안 믿어도 운명을 믿는다고. 운명이 시키는 대로 살다 보면 바보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세월은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기 마련이야. 나같이 하찮은 인생이라고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인생이 뭔지 알아? 걸어다니는 그림자야. 해 떨어지면 사라지는 것이지.”

해가 떨어지면 사라지는 ‘걸어다니는 그림자’가 인생이라니, 길 위에서 내내 소설을 길어온 작가가 아니면 지어낼 수 없는 득의의 문장이다. 허망한 인생이지만 작중 인물 박호구는 “세상에는 좋은 것도 있고, 불편한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었으나 그 모두를 친구로 여긴다면, 좋은 것이든 미운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성가실 일도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었다”고 돌아본다. 그것은 세상 낮은 곳의 모든 존재들에게 작가 김주영이 대신 던지는 지극한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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