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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삶 나의길] “교육은 열정 없으면 절대 못해… 인재 육성이 가장 큰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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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08 09:00:00 수정 : 2017-04-07 21: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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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출신 현역 최고령 교육자 김희수 건양대 총장 현재 동양 최대 규모의 안과전문병원으로 꼽히는 김안과병원을 개원해 수많은 이들에게 빛을 찾아준 명의(名醫). 남들은 일을 손에서 놓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고향에 대학교를 설립해 명실상부한 지방 명문대로 발전시킨 현역 최고령 교육자. 김희수(89) 건양대학교 총장을 수식하는 두 가지 키워드다.

5일 건양대 대전캠퍼스 총장실에서 만난 김 총장은 우리 나이로 아흔의 고령이지만, 눈은 젊은이 못지않게 빛났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김 총장은 “신체 나이를 측정해보면 50대로 나온다”며 “젊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젊은 사람처럼 열심히 해 달라는 응원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웃어보였다.

김 총장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충남 논산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와 후덕한 어머니 덕분에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 외양간과 돼지막까지 있었을 만큼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국가가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김 총장은 논 1000여 평만 물려받게 됐다.


김희수 건양대 총장이 총장 집무실에서 “교육은 열정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며,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고 교육철학과 인생철학을 말하고 있다.
대전=하상윤 기자
김 총장이 의사의 꿈을 품게 된 건 독학으로 의사가 돼 존경을 받는 큰형님을 보면서부터다. 그는 “형님은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왕진 가방을 메고 찾아가 환자를 돌봤다”며 “그런 형을 보며 나도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김 총장에게 가장 슬픈 해로 기억된다. 그해 지금의 연세대인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한 김 총장은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가 서울이 집중폭격 대상이 되는 바람에 한동안 고향 논산에서 지내야 했다.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서울로 올라간 김 총장은 둘째 형 가족과 누나가 조카딸 한 명을 빼고 전부 희생된 사실을 알고,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울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고향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저세상 사람이 됐을 것”이라며 “전쟁으로 사람의 생사가 순간에 갈리는 경우를 겪은 뒤 한번 왔다 가는 인생을 정말 값지게 살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전쟁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총장은 당시로서는 크나큰 도전을 한다. 아내와 네살배기 딸을 남겨둔 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김 총장은 “당시 실습할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정이 열악했다”며 “장래를 위해 선진 의학을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 총장은 대학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미국에서 배운 선진 기술과 의료 서비스 정신을 적용해보겠단 일념으로 1962년 서울 영등포구에 김안과를 개원했다.

당시 영등포는 서울의 반이라고 해도 될 만큼 넓었지만, 사실상 변두리였다. 김 총장은 신흥 인구밀집지역인 데다 공장에 다니는 젊은 사람이들이 많다는 점을 이유로 영등포를 택했다. 개원 후 처음에는 환자가 없어서 전단지를 만들어 수원과 안양까지 담벼락에 직접 붙이고 다녔다.

김안과의 성공 비결은 김 총장의 투철한 서비스 정신이다. 그는 “개업하면서 스스로 ‘적어도 10년 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안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워 열심히 했다”며 “당시 대부분의 병원이 오후 6시에 문을 닫는 등 공급자 위주의 진료를 했는데 김안과는 365일 언제 찾아가도 문이 열려 있는 병원, 환자에게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병원이 되려 노력했다.

1960년대 말부터 전국에서 엄청난 환자가 김안과로 몰리기 시작했다. 당시 안과의사 10명이 하루에 3000명 가까운 환자를 진료한 적도 있었다. 눈병이 크게 번진 1980년대 중반엔 하루 외래환자가 수천명에 달해 ‘소매치기 주의’ 안내문을 곳곳에 붙이기도 했다. 현재 개원 50주년이 넘은 김안과는 50여 명의 전문의를 포함해 3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연간 외래환자는 40만 명에 이른다.

의료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김 총장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김 총장은 고향인 논산에 중·고교와 대학까지 설립하는 등 교육행정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1979년 논산 양촌면의 한 중학교가 운영난으로 폐교 지경에 이르자 지역 유지들이 학교 운영을 부탁해 왔다”며 “평소 ‘꿈 너머 꿈’이라는 말을 좋아해 의사로서 성공한 이후의 인생을 고민하던 찰나 육영사업에 관심이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김 총장은 폐교 위기에 있던 중학교를 부채와 함께 인수해 새로 건물을 짓고 운동장을 조성해 1980년에는 중학교를, 1983년에는 고등학교를 각각 세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변 지인들은 김 총장에게 대학 설립까지 권유했다. 그러나 대학 설립은 중·고교 설립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당시 대학가는 학생운동이 매우 거셌던 시기로, 정상적인 수업이 힘들었다. 이미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에서 서울도 아닌 지방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총장은 ‘고향에 제대로 된 대학을 설립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건양대 설립을 결정했다.

부지 매입과 건축자재 확보 등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건양대는 1990년 설립 인가를 받은 뒤 이듬해 무사히 개교했다. 김 총장의 신념이 대입 수험생들에게도 전해진 걸까. 건양대 입학 경쟁률은 신설 대학으로는 매우 높은 편인 7.5대 1을 기록했다.

건양대는 개교 이래 ‘최고’보다는 ‘유일’을 모토로 끝없는 차별화를 시도했다. 후발 대학으로서 똑같은 커리큘럼과 체제로 수도권 대학들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김 총장의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 결과 건양대는 개교 이듬해인 1992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했고, 1994년 의과대학 신설과 대학원 설치 인가를 받는 등 짧은 시간 안에 발전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최근 5년간 건양대의 취업률은 전국 종합대학 5위 이내에 줄곧 들어갔으며, 2014년에는 취업률 74.5%, 2015년엔 81.9%로 2년 연속 졸업생 1000∼2000명 기준 대학 취업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교육부의 주요 국책사업인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고, ‘산업연계교육활성화 선도대학’(PRIME)과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대학 특성화 사업’(CK-I)에 선정되는 등 기록을 이어왔다.

의사나 임상병리사 등을 뽑는 보건의료계열 국가시험에서 6년 연속 수석 합격자를 배출한 점도 건양대의 자랑이다. 비교적 짧은 역사와 지방대학이라는 한계점에도 이 같은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은 김 총장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고 밝혔다.

김 총장은 학교 얘기를 할 때 부쩍 더 생기가 도는 모습이었다. 그는 “학교 얘기를 하는 건 신나는 일”이라며 “교육은 열정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 총장은 “내가 지금 돈이나 명예를 더 바라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들을 키우고,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큰 기쁨”이라고 설명했다.

2001년에는 대학 설립자인 그가 직접 총장으로 취임했다. 김 총장은 취임 후 2004년 전국 최초로 학생들의 취업지원을 위한 전용건물을 개관하고, 학생들에게 맞춤형 취업지도와 상담 등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외국어와 정보기술(IT) 등을 방과후 과외수업 형태로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그러는 동안 건양대는 교육부나 다른 지방대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2011년 건양대에서 전국 최초로 시행한 ‘동기유발학기’는 교육부 ACE사업의 대표적인 성과모델로 자리 잡았다. 신입생 때 3주 과정으로 진행되는 동기유발학기에는 전공 소개 교과목을 듣고 심리검사와 진로적성검사 등을 하며, 다양한 동기유발 프로그램을 이수한다. 현재 100개대가 관련 내용을 벤치마킹하고, 6개대가 유사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건양대가 전국 최초로 시도한 프로그램과 커리큘럼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김 총장은 “대학도 사회의 흐름과 직업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실용교육뿐 아니라 인성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똑똑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도 좋지만, 착하고 성실한 성품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나도 쓸모없는 인재란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건양대 학생들은 인성 글쓰기나 명사특강 등을 통해 인성의 중요성을 배우고, 모든 교과목에선 인성이 중요한 평가 지표로 꼽힌다.

학생들은 김 총장을 ‘빵 총장’이라고 부르며 마치 동네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대한다. 어느 시험 기간에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특해 빵과 우유를 사서 나눠 주기 시작했고, 이게 일종의 전통이 되면서 김 총장에게 빵 총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새벽부터 학교를 돌며 담배꽁초나 휴지를 주워 ‘담배꽁초 총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믿기 힘들겠지만 우리 대학 학생들은 총장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며 “학생들을 만날 때 특별히 격식을 차리지 않고, 최대한 많이 만나려 노력한 결과”라고 웃으며 말했다. 졸업생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학위증을 전달하고 악수를 나누기 위해 졸업식을 3일간 진행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김 총장에게 인생의 지표로 삼은 말이 있냐고 묻자 공자의 ‘군자무본본립이도생(君子務本本立而道生)’이란 말을 꺼냈다. ‘군자는 근본을 닦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근본이 서야 도가 나오는 법’이란 뜻이다. 김 총장은 근본을 기본으로 바꿔도 같은 뜻이 되며 사람의 기본은 ‘정직’, 성공의 기본은 ‘노력’, 병원의 기본은 ‘치료’, 학교의 기본은 ‘교육’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에서 이 기본이 지켜지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지난해 말부터 이어져온 우리나라의 혼란한 정국도 정치인과 교수, 의사 등이 각자의 기본을 지키지 않아 빚어졌다고 김 총장은 진단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김 총장은 차기 대통령은 인간성이 좋고 정직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기본적으로 갖춘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에도 김 총장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건강 비결이라도 있냐고 묻자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열심히 일하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인터뷰가 끝난 뒤 김 총장과 캠퍼스를 함께 거닐면서 그가 어떻게 의료인으로, 또 교육가로 성공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대전=지원선 선임기자 president58@segye.com

◆김희수 총장은
 

△1928년 충남 논산 출생 △공주고 졸 △연세대 의대 졸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 △연세대 의학박사 △1962년 김안과병원 개원 △1980년, 1983년 건양중·고 설립 △1991년 건양대 설립 △2000년 건양대병원 개원 △2016도전한국인 대상 수상 △건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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