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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상실감으로 구멍나고 닫힌 마음들 말할 수 있게 돕고파

입력 : 2017-04-06 19:53:14 수정 : 2017-04-06 21: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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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숙 ‘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마음이 꽉 닫혀버린 이에게 바늘귀만큼의 구멍이라도 뚫어주고, 깊은 상실감으로 가슴 한편이 구멍 난 사람에겐 바람막이 점퍼를 입혀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제 입술을 열어 스스로 말하고 집 한 채씩을 짓도록 돕고 싶었다.”

소설가 유경숙(사진)이 최근 펴낸 엽편(葉編)소설집 ‘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푸른사상) 책머리에 적은 글이다. 200자 원고지 10~15장 분량의 짧은소설 61편을 모아놓은 이 소설집은 유려하고 고아한 문체만으로도 과연 가슴을 덥히는 힘을 지녔다. ‘유랑하는 자들’ ‘술의 시간’ ‘고요를 깨뜨리는 소소한 옛이야기’ ‘탱자나무집 계집애’ ‘증미산 사람들’ ‘별종들’ ‘천지자연이 나의 스승’ 등으로 장을 나누어 실어 나르는 이야기의 구체적인 속살은 풍미가 깊다.

표제작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내의 이야기다. 중세철학 자료를 찾기 위해 봉쇄수도원에 들어가 팔자에 없는 수도승 노릇까지 하면서 오랜 시간을 바쳐 박사논문을 완성해내고 보니 정작 세상은 문장들이 실시간 광속으로 날아다니는 문명의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하릴없이 백수광부가 돼버린 이 사내는 침낭을 넣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지하철역으로 스며드는 신세다. 짧은 이야기에서 흔히 구사하는 반전에 기대지 않는다. 담담하고 묵직하게 세상과 사람과 자연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자전적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긴 ‘탱나자무집 계집애’의 이야기들은 서럽고 애틋하다. 육남매 집안의 언니는 영등포까지 올라가 덜 자란 키를 속이고 겨우 나일론공장 시다(보조원)로 들어간다. 깊은 밤 아무도 없는 공장에 몰래 들어가 자투리 옷감으로 동생들의 속치마와 덧신 등 옷가지를 만들어 선물보따리를 들고 언니는 ‘섣달 그믐날’ 귀향 열차를 탔다. 빼곡한 사람들로 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아수라장에서 보따리를 엉뚱한 역에 흘려버린 언니는 그때부터 내내 울어 눈물이 말라버렸고 동생은 언니의 빈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검정 ‘구르마스’를 벗어놓고 수영을 하다 잃어버려 산을 타고 귀가하다 혼절했던 그녀를 어머니는 ‘독한 년’이라며 혀를 찼다.

‘증미산 사람들’의 갖가지 사연, 까치들의 악다구니를 외면하고 전신주 위 까치집들을 걷어내고 돌아오니 정작 자신의 집이 사라진 ‘작업반장 조씨’ 같은 별종들, 초조(初潮)를 시작한 여자 아이 치마를 바라보며 ‘꽃물’이 들었다며 얼굴이 발개진 ‘천지 자연’의 사제 이야기까지 이 소설집은 읽는 이들의 부유하는 머릿속 진애를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을 발휘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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