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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는 스탈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입력 : 2017-03-31 22:22:06 수정 : 2017-03-31 22: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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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비밀문서 분석해 쓴 마오쩌둥의 삶
中공산당 창당 초기 소련 지원 절실했던 마오
경쟁자 끊임없이 의심했던 스탈린 의식
보스 안심시키기 위해 숨죽이며 고통 감내
러시아 비밀 문서를 토대로 쓴 마오쩌둥의 평전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캐피털대 역사학 교수인 알렉산더 판초프는 러시아 국립 기록보관소의 비밀 문서들 가운데 2만여건을 분석해 이 책을 썼다.

저자가 새로 밝혀낸 내용은 우선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관계다. 종래 서유럽과 미국 쪽 시각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심각히 대립했으며 중·소 분쟁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러시아 쪽 문서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에 맞선 게 아니라 충실한 추종자였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죽고 난 후에야 마오쩌둥은 소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충성하는 보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한 인물로 묘사됐다. 스탈린은 마오가 제2의 티토(스탈린과 헤게모니 다툼)가 될까 계속 의심하고 시험했다.

실제로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 리더들의 운명은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 손에 달려 있었다. 중국공산당 리더들은 ‘트로츠키’(스탈린의 정적) 동조자였다는 이유로 굴욕적인 심문과 자아비판을 수없이 감내했다. 심지어 1938년 스탈린은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캉성, 천윈, 리리싼 등 중국 지도자들을 처형하려 했다. 스탈린이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중국공산당의 많은 인사들은 희생물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가 밝혀낸 문서에는 스탈린이 1935년 7월 제7차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 확산조직)에 참석한 중국 대표 대부분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암시한 문건도 있다.


마오쩌둥(왼쪽)이 1949년 12월 21일 스탈린의 70회 생일에 초대돼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함께 발레공연을 관람하던 모습이다. 마오쩌둥은 이후 한 달간 스탈린을 만나지 못하는 등 스탈린의 불신에 모멸감을 느꼈지만 그의 추종자로 숨죽이며 살았다.
민음사 제공
스탈린은 마오쩌둥만큼은 ‘블랙리스트(제거 대상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살아남기 위해 숨죽이며 굴기했다는 분석이다.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서로 엇나갔다는 통념 역시 다르게 되어 있다. 스탈린은 한반도를 통일(공산화)시킬 생각이 없었다. 단지 미국이 북한, 중국과 엉켜 싸우도록 했으며 미국 힘빼기가 주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전쟁 당시 스탈린이 공군 지원 약속을 어겼음에도 마오쩌둥은 150만명이나 파병, 수십만명의 중국군이 죽도록 내버려뒀다.

러시아에서 나온 문서이기에 스탈린이 두목이고 마오쩌둥은 추종자였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러시아 비밀 문서는 종래 통념을 여지없이 깨고 있다. 사실 중국공산당 창당 초기 소련의 지원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싸울 수 없었고, 혁명도 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물자 지원과 군사고문단 파견으로 마오쩌둥은 군대를 무장할 수 있었다. 다만 혁명 방식은 달랐다. 소련은 도시 노동자 봉기로 혁명을 시작했으나, 마오는 농촌에서부터 혁명을 시작했다.

아울러 비밀문서는 마오쩌둥이 소련과 삐걱거린 계기는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원한관계에 근거했다고 밝혔다. 마오는 흐루쇼프를 신뢰할 수 없는 어릿광대로 비하했고 멸시했다. 저자는 “마오쩌둥과 흐루쇼프의 개인적인 원한이 1960년대 중·소련 대립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흐루쇼프는 중국과 전쟁을 준비했으며, 실제 국지적 무력 충돌도 빚었다. 만주에 원폭 투하나 원자력 기지 폭격 방안도 기획되었다.

저자는 또한 대약진운동이나 문화혁명을 다른 시각에서 풀이한다. 문화대혁명을 단순히 마오쩌둥의 권력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마오는 새로운 인민사회를 만들려는 이상주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신중국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인민들은 자본주의로 돌아갈 미몽에 젖어 있었다고 마오는 판단했다. 중국의 전통 문화적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는 것. 마오의 이 같은 무모한 판단(몽상)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으며, 대약진운동과 문혁의 실패로 수천만명이 죽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역사적으로 평가했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1기 6중전회)에서였다.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關於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가 그것이다. 이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에서 실수했지만 중국 혁명을 성공시킨 공적이 훨씬 크다고 적시했다. 이른바 ‘공적이 7할이고 과오가 3할이라는 것.

우리말로 옮긴 심규호 제주대 교수는 “마오쩌둥은 성인군자가 아니며, 악마도 아니다. 조국을 위해 번영과 국제적 명성을 얻고자했던 몽상가적인 복잡한 인물이었다”면서 “그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유토피아의 막다른 골목에 빠졌으며, 주변의 아첨꾼들에 의해 개인숭배의 대상이 되면서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내전에 빠진 중국 대륙을 통일시키고, 선진 서구 열강이나 일본에 오랫동안 멸시당한 중국과 중국인들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이가 바로 마오쩌둥”이라고 평가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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