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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주자 줌 인] 고비마다 일어선 강골의 승부사… 막말 논란은 ‘양날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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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31 19:05:24 수정 : 2017-04-01 00: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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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자유한국당 홍준표 / 태생적 흙수저… 변방돌던 비주류 /‘슬롯머신’ 거물들 대거 구속시켜… ‘모래시계 검사’로 존재감 알려
‘물불 가리지 않는 강골 검사, 집권여당 대표, 재선 도지사.’

화려한 이력들과는 다르게 인간 홍준표의 삶은 비주류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그가 펴낸 자서전의 제목도 ‘변방’이다. 자신의 삶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이라고 술회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가 소위 ‘대통령감’이 되는지를 놓고 벌써부터 말이 많다. 게다가 국정농단 사태와 탄핵국면을 거치며 보수진영 전체가 위기를 맞았다. 대선구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불리하지만, 고비 때마다 오뚝이처럼 위기를 넘겨온 그가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할 것인가는 이번 대선의 관전포인트 중 하나다.

◆검사 시절부터 시작된 비주류 본능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는 1954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소 경비원, 어머니는 달비(가발을 만들기 위한 머리카락) 장사를 하며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성공에 대한 욕심은 남달랐다. 없는 살림에 부모님을 졸라 혼자 대구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정도다. 홍 후보는 세 차례 사법시험에 낙방했다가 대학 졸업 5년 뒤인 1982년에야 사시에 합격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31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대통령후보자 선출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큰절을 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어렵사리 법조계에 발을 디뎠지만, 검찰생활 내내 ‘요직’으로 꼽히는 대검 중수부나 공안부 근처에는 가보지 못했다. 홍 후보의 표현에 따르면 “위에서 알아듣게 얘기하면 적당히 넘겨야 할 사건들만 끝까지 물고 늘어지다가 찍혔다”고 한다. 초임 청주지검 시절 법무장관 처가 관련 사건을 수사했고, 1988년에는 당시 치안본부 정보과 소속이던 서정희 분실장을 구속기소한 데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의 큰 형 기환씨와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그러다 괘씸죄로 광주지검으로 좌천된 이후에는 조직폭력배 수사를 전담했다.

서울지검 강력부로 복귀한 홍 후보는 인생의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끈질기게 파헤쳐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전 의원 등 권력실세들을 구속시켰다. 이 사건은 나중에 드라마 ‘모래시계’의 소재가 되면서 홍 후보가 스타 검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반면 검찰 내부에서는 ‘통제에 따르지 않는 별종’으로 낙인찍혀 한직을 전전하게 됐다.

1995년 검사를 그만둔 뒤 바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검사 시절 잡아넣은 조폭들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듬해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거창한 포부가 아니라 조폭의 위협에서 가족을 구해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가 31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를 마친 뒤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10년 전 경선 4위에서 1위로 ‘우뚝’

정계 진출 이후에도 그의 강골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김대중(DJ)정권에서 야당 의원 신분으로 ‘DJ 저격수’ 역할을 자처했다. 초·재선일 때는 당 지도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3선 때는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맡는 대신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도전했다가 4위에 머물며 쓴맛을 봤다.

변방을 떠돌던 그는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1위를 거머쥐었다. 그는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이제 저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왔다. 변방의 그 치열했던 정신을 잊지 않고 총선과 대선에서 압승하도록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그 약속과 달리 대표 취임 7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 홍 후보가 내놓은 공천쇄신안을 포함한 재창당 구상을 당내 모든 계파가 거부하면서다. 무계파 대표의 한계였던 셈이다.

홍 후보의 험난한 정치 역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듬해 19대 총선 낙마로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를 경남지사 보궐선거 당선으로 돌파해 냈다. 2014년에는 도지사 재선까지 성공하며 기세를 올렸다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명박정부의 자원비리 수사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주머니에서 나온 메모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홍 후보는 성 전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1억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심에서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올 초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구사일생한 홍 후보는 대권도전을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번에는 비주류 경험이 도움이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둔 덕분에 탄핵사태의 책임을 비켜갔다. 때마침 바람도 불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연달아 대선 불출마 입장을 밝히며 갈 곳 없는 보수 지지층이 홍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며 반사이익을 얻었다. 홍 후보와 박 전 대통령의 인연도 묘하다. 홍 후보는 5년 전 당 대표에서 물러나며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당권을 넘겨줬다. 이번에는 공교롭게 박 전 대통령의 구속이 확정된 31일 홍 후보가 한국당의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막말 논란과 ‘성완종 리스트’ 과제

할 말은 묵혀 두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성격 탓에 홍 후보는 늘상 ‘막말 논란’에 휩싸인다. 2008년 10월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에는 퇴임 후 고향 경남 김해로 내려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해 “그 사람처럼 아방궁을 지어서 사는 사람은 없다”며 “혈세 낭비의 대표적 사례”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저 정비에 1000억원의 국비가 투입됐다는 그의 말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의 사비로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에는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에게 “일하기 싫으면 집에 가서 애나 봐라”고 해 성차별 논란을 자초했다. 2011년 대학생 타운미팅 행사에서는 과거 소개팅 사연을 소개하며 “이화여대 계집애들 싫어한다”고 한 발언이 뭇매를 맞았다. 지난해 7월에는 홍 후보의 도지사 사퇴를 촉구하며 단식농성하는 도의원에게 “쓰레기가 단식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고 비꼬아 논란이 됐다. 최근에도 노 전 대통령을 ‘뇌물 먹고 자살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데 이어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없는 사실을 뒤집어씌우면 노 전 대통령처럼 자살을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막말 논란은 양날의 칼이다. 존재감을 부각하고 지지층 결집을 견고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반면 예선이 아닌 본선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홍 후보 언사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외연 확장에는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홍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비호감도를 기록하는 원인을 그의 ‘입’에서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은 홍 후보의 가장 아픈 부분이다.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최종심이 남아 있다. 김진태 후보 등 당내 경선 라이벌은 물론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까지 이 문제를 놓고 홍 후보의 출마자격을 문제 삼았다. 대법원 결정은 대선 이후에 나올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지만, 사법적 판결에 앞서 유권자의 도덕성 검증 의혹을 해소할 만한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 고민거리다.

홍 후보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불거진 직후인 2015년 5월, 경선기탁금 출처와 관련해서도 “원내대표(2008∼2009년) 때 받은 국회대책비(특수활동비)에서 남은 돈을 집사람에게 줬는데 그 돈을 대여금고에 넣어놨다가 기탁금으로 준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공무상 업무에만 써야 하는 특수활동비를 사적으로 유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박세준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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