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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서야 돋아났다… 환멸을 받아들일 마음자리

입력 : 2017-03-30 20:36:45 수정 : 2017-03-30 20: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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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오현종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문학동네)는 소설가 오현종(44·사진)이 10년 만에 펴낸 단편모음집이다. 세 번째 소설집이고 아홉 번째 책이다. 작가로서 연륜이 쌓여온 만큼 장편을 쓰는 틈틈이 집필했다는 단편 8편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다. 대체로 정밀하게 그려내는 일상의 환멸과 우울이 한숨처럼 깔리는 정조다.

첫머리에 배치한 ‘부산에서’는 타인의 일상을 대신 사는 소설가의 1년을 그린다. 안식년을 맞아 장기여행을 떠나는 부산의 한 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의 수업을 대신 맡아 타지에서 살아간 시간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부산에 내려온 영화감독 일행과 술을 마시다 그중 한 사람이 “소설의 시대는 이제 갔어”라고 무심하게 뱉는 대목에서 화자는 새삼스럽게 모욕을 느끼지만, 10년 넘게 소설가로 살아오면서 한두 번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짐짓 태연한 척한다. 뒤늦은 감독의 변명도 “소설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나만은 아닌 것 같다는 위안”조차 줄 수 없다. 화자는 부산을 떠나면서 되뇐다. “쓸 수 있을까, 부산을. 부산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이어지는 ‘K의 어머니와 면회를 갔다’의 환멸은 더 진하다. 지난 시절 군에 입대한 K의 면회를 그의 어머니 강요로 1박2일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K의 어머니가 내뱉는 천박하고 낯 화끈거리게 만드는 속물적인 대사와 행동을 고스란히 참고 다녀왔다. K와 헤어졌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 시절 이미 그는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는 소문이다. 뒤늦게 그 사실에 화가 난 여자에게 현재의 애인 Y가 하는 말. “그런데 그 남자가 나쁜 놈이면 안 되니?” 청춘의 그 시절에 우리 모두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각자 무엇에선가 달아나고 싶었던 게 아니었느냐고 작가는 묻는다. 환멸이 서글픈 생의 긍정으로 돌아설 마음자리가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돋아나는 셈이다.

표제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는 영국의 로커 오지 오즈번의 노래에서 따온 제목으로, 결혼을 앞둔 남녀가 방에 갇힌 뒤 전개되는 심리의 변화를 환상적으로 그려낸 단편이다.

오현종은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이 십 년간 지도 없이 움직여온 내 마음의 경로로 읽혔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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