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대표적인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1928~2012)는 작가의 역할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멕시코혁명의 왜곡과 부패 과정을 회고하는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그는 ‘이상과 현실의 모순’이 자신을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작가의 국적과 피부와 젠더가 무엇이든 언어와 상상력의 활기를 제대로 발현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그들의 공동체를 이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신념을 피력한다. 지난 1월 타계한 영국 작가 존 버거(1926~2017)는 “세상이 더 인간적이라면 나는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이어받은 장편 ‘영혼의 집’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각광받은 칠레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75)는 “이야기는 영혼의 일부”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그러하듯 작가와 소설의 존재는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불멸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녀는 “저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마음으로 느끼는 방법”이어서 “제가 악마를 쫓아내고 천사를 맞이하고 제 자신을 탐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라고 밝힌다. ‘아프리카 영어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1930~2013)는 작가란 세상을 향해 절망을 이야기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결국 종착지는 같지만 아체베처럼 낙관적인 태도로만 다른 작가들이 소설을 보는 건 아니다.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73)는 작가란 “트라우마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뭔가 평형을 잃은, 어렸을 때 절대 낫지 않는 일종의 상처를 받은” 존재들이라면서 “몇 주씩 방에 갇혀서 힘들게 소설을 쓰는 것은 말하자면 그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것”이라고 본다. 이스라엘 소설가 다비드 그로스만(73)은 작품을 쓰는 행위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상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면서 “그저 상처를 다시 배치하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나 역시 상처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이밖에도 올리버 색스, 캐럴 실즈, 윌리엄 트레버, 에드워드 사이드, 레이놀즈 프라이스, 지넷 윈터슨, 앨리스 워커, 아미타브 고시, E L 닥터로, 루이스 어드리크, 제인 스마일리, 헤럴드 블룸, 제인 앤 필립스, 니콜 브로사르, 마틴 에이미스, 자메이카 킨케이드의 목소리가 수록됐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작가들도 많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소수 언어권에 갇혀 사는 독자의 한계를 절감하던 경우가 많았다. 세계문학을 보는 시야를 넓히면서 낯설거나 친숙한 그들이 공통으로, 혹은 자신들만의 색깔로 토로하는 작가란 무엇인지 새겨볼 만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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