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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야구장은 놀이터이자 학습의 장… 승패에 연연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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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5 09:00:00 수정 : 2017-03-24 20: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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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째 한국리틀야구연맹 이끄는 한영관 회장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활약한 한희원(39) 프로의 아빠로 유명한 한영관(68)씨는 11년째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프로야구 투수 출신인 손혁(44)은 한 회장의 사위로 한 프로의 남편이다. 국내 아마추어 시절 48승을 거두고 일본에서 대학을 마친 한희원은 일본과 미국투어에서 모두 신인상을 차지했고 LPGA투어 통산 6승을 거뒀다. 손혁은 공주고 시절 박찬호, 조성민 등과 투수 황금 세대로 이름을 날리다 프로야구 LG KIA 등에서 뛴 뒤 넥센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한 회장 역시 서울 성동고와 고려대를 거쳐 1976년까지 실업팀 한일은행에서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스포츠 가족으로 유명하다.

아버지가 군 장성출신으로 서울 토박이인 한 회장은 중학교 때 아이스하키를 했다. 당시 서울에는 실내 아이스 링크가 종로구 숭인동에 하나밖에 없어 훈련을 하면 날마다 밤늦게 끝났다. 그래서 아이스하키를 그만뒀고, 입학 시험을 치르고 성동고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부모의 반대에도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가 그다지 격렬하지 않고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야구 해설가 하일성씨는 성동고 동기생이다. 수업은 수업대로 다 하고 방과 이후에 시간을 쪼개 야구를 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말발이 세어서 하구라라고 불렸어. 늘 웃음을 주는 재미있는 친구였지. 50년을 넘게 한 오랜 친구가 갑자기 떠나 가슴 아프다.” 한 회장은 고려대에 진학했고, 하씨는 경희대에 진학한 뒤 환일고 체육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이 서울 중구 장충동의 리틀야구장에서 어린이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본 뒤 환하게 웃고 있다.
남정탁 기자
한 회장은 실업팀 한일은행에서 1루수를 맡았다. 당시 오전에는 은행일을 보고 오후에 훈련을 했다. 한일은행에는 대선배인 김응용(76) 대한야구협회장, 2017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인식(73), 강속구의 왼손투수 임신근씨 등 막강 멤버가 포진해 실업야구를 호령하다시피 했다.

당시 룸 메이트였던 김인식씨와는 50년가랑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2살 위로 같이 늙어가는 입장이지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말을 놓은 적도 없이 깍듯하게 모신다. 일주일에 보통 4∼5번은 만난다. 가족간에도 허물이 없다고 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자주 얼굴을 보는 편이다. “야구 경기는 밤11시가 되어서 끝나기 때문에 그때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지. 남들 같았으면 술자리를 파할 시간에 술자리를 시작해 보통 새벽 4∼5시까지 하곤 했지. 그래서 인식이 형이 10여년 전 중풍을 맞은 것에 대해 내 책임도 적지 않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둘 사이에 무슨 할 얘기가 많냐는 질문에 한 회장은 “젊었을 때에는 만나면 항상 술이었지만 이젠 밥을 먹거나 차 한잔 마시는 정도다. 인식이 형이 이번에 WBC 한국대표팀 감독을 맡아 초반 탈락했지만 70을 넘은 노인네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입술이 부르트고 얼굴도 까칠해졌어”라고 말한다.

한 회장은 한일은행에서 3년간 선수로 뛰다 일반 행원으로 한계를 느껴 공부를 하느라 일찌감치 야구를 떠났다. 당시 한일은행 야구팀은 워낙 막강 멤버로 구성돼 비집을 틈도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일본으로 유학도 갔다 왔다. 한 회장이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이유다. 비료 포장재를 생산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야구에 바친 열정으로 사업도 열심히 했다. 야구에 대한 그리움은 가득했지만 야구와 가까이할 수는 없었다.

둘째 딸 한희원의 미국 투어 뒷바라지를 위해 2000년대 초반 4년여간 미국에서 ‘골프대디’로 맹활약했다. 밴을 하나 구입해서 투어를 따라 다니느라 동서횡단을 무려 4번이나 했고 안 가본 도시가 없을 정도다, 딸이 한국음식을 먹고 힘내라고 음식을 열심히 준비하느라 요리사급 솜씨도 갖추게 됐다. “휴대전화도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지도 한 장 들고 미국 땅을 누볐다. 고생 많이 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야. 진학, 결혼, 은퇴는 철저하게 딸 의사를 존중했다. 결혼과 출산을 하고도 계속 선수를 했다는 점에서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된 것 같아 대견스럽다.”

베스트 스코어가 4언더파일 정도로 골프 고수였던 한 회장은 “딸에게 골프시키기 전에 수영부터 3년을 가르쳤다. 근육 발달과 유연성에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희원은 아버지의 체계적인 조기 교육 속에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골프 명문인 서울 세화여고를 거쳐 일본 나라현에 있는 류코쿠대학을 졸업했다. 야구 선수 사위를 본 배경에도 아버지가 있었다. “희원이를 세화여고 2학년 때 고려대 야구부의 오대산 극기 훈련에 보낸 적이 있었어. 그때 혁이를 처음 봤다. 나중에 희원이를 데리고 미국 시애틀에 갔을 때 우연히 혁이도 거기에 있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는데 운명이 아닌가 싶었다. 딸이 혁이랑 결혼하겠다고 해서 미국에서 우승하면 허락한다고 했더니 곧바로 우승하더라.”

한 회장은 손혁을 100점짜리 사위라고 평가한다. “야구를 한 친구치고는 자기 일에 너무 열심이다. 야구 관련 책도 쓰고 방송해설도 하고, 톰 하우스 아카데미에 들어가 공부도 열심히 하더라. 그리고 아주 가정적”이라며 사위 자랑에 침이 마를 정도다. 한 회장은 야구 선수 아빠와 골프 선수 엄마 사이에 태어난 10살 된 손자도 운동을 시킬 것이냐는 질문에 “희원이도 그랬지만 전적으로 본인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강조한다.

‘골프 대디’를 마친 뒤 귀국한 그가 다시 야구판에 돌아오게 된 것은 2006년이다. 선수로서 은퇴한 지 35년이 넘어서였다. 절친인 당시 하일성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과 대학동기인 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녹을 먹었으면 나이를 먹은 만큼 야구를 위해 봉사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게 두 친구의 주문사항이었다. 리틀야구연맹 회장에 취임한 그는 “학부모와 심판은 멱살잡이를 하고 감독들이 돈을 내서 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괜히 맡았나 싶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무보수에 판공비도 없이 한국 야구의 미래와 초석만을 위한 책임감 하나로 뛰어든 한 회장은 팀 창단에 공을 들였다. 집안의 반대에도 사비도 적잖이 쏟아부었다. 연맹에 운영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11년 전 리틀야구팀이 전국에 16개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160여개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 회장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저변 확대를 시도했고, 지방자치단체 단위의 팀 창단을 유도했다. 시·군·구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발로 뛰느라 전국 시·군·구를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제 노력보다는 야구대표팀의 WBC 4강, 베이징올림픽 우승 등 분위기를 타는 등 운이 좋았다. 지자체에서 많은 도움도 줬고….”

한 회장은 요즘도 오전 10시면 어김없이 중구 장충동의 리틀 야구장으로 출근한다. 연맹 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오후 5시가 넘어 야구장을 떠난다. 사업체는 동생에게 맡긴 상태다.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의 한 회장은 “야구 꿈나무들이 훈련하고 시합하는 걸 지켜보면 젊어지는 느낌이 들어. 전국에 손자가 3500명이나 된다”고 웃었다. 연맹에 등록된 선수 모두들에게 피붙이처럼 애정이 간다는 의미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동심으로 돌아간 듯 해맑아 보였다. “승패에 연연하지 말고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부모의 욕심은 자녀의 장래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야구장은 놀이터이면서 학습의 현장이다.”

한 회장은 리틀야구 지도자와 심판들에게 첫째도 도덕성, 둘째도 도덕성을 강조한다. 그래야 어린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지도자 한 명의 비행이나 잘못은 어린아이들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되지. 그럴 바에야 야구를 안 시키는 게 낫지 않겠어.”

한 회장은 2014년 8월 큰일을 해냈다. 한국 리틀야구가 미국을 꺾고 29년 만에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것이다. 한국 어린이들의 선전은 연일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면서 화제를 뿌렸다. 한국 내에서보다도 미국에서 더 큰 화제가 됐다. 한국 리틀야구는 지난해에도 월드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리틀야구의 강호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것만 해도 행복했는데 우승까지 하니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지. 미국에서는 리틀야구 인기가 메이저리그를 뺨칠 정도로 대단하더라고.”

한 회장은 지난해 회장직을 미련없이 내놓았다. 대한체육회의 경기단체장 3회 연임 금지 제도 때문이었다. “지도자 130여명이 연판장을 돌렸다더구먼. 전임 회장의 잔여 임기 2년을 포함해 만 10년을 했으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연임해달라는 연판장이었어. 대한체육회도 연임을 승인해줬어.” 한 회장은 프로야구 스타들이 1년에 한두 번씩이라도 리틀야구장을 찾아 재능기부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것이 리틀야구 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한국 리틀 야구는 오는 31일 46년간의 장충동 시대를 끝내고 경기도 화성시대를 맞는다. 리틀연맹과 화성시가 3년 동안 추진한 리틀 야구장 전용구장 8개 면이 개장하기 때문이다. 화성 드림파크다. 최인석 화성시장이 우정면 매향리의 미공군 폭격장에 평화의 공원을 마련했는데, 그중 일부를 리틀야구장으로 조성한 것이다. “리틀 야구장이 생겨 대회를 하면 그곳에서 먹고 자느라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지. 100개팀이 출전하면 99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돈을 쓸 수밖에 없거든.” 리틀 야구 대회는 국내 대회만 해도 1년에 16개가 열린다. 이 중 대전에서 열리는 제5회 박찬호배 리틀야구대회, 속초시장기 대회 등을 빼면 화성 드림파크에서 12개 대회가 열리게 되는 셈이다.

드림파크가 개장하게 돼 미국이나 일본처럼 연령별 야구대회를 열 수 있어 어린이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야구를 할 수 있고 한국야구 발전의 초석을 놓아 책임을 다해 뿌듯하다는 노병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박병헌 선임기자 bonanza7@segye.com

◆ 한영관은…?

△1949년 2월 서울 중구 약수동 출생 △서울 성동고(1967년) △고려대 졸업(1971년) △실업팀 한일은행 야구 선수(1971년)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2006년∼) △제12회 일구회 대상(2007년) △제4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공로상(2014년) △고우체육회장(2012∼2016년) △삼화수지 회장(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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