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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이 본 아관파천 당시 고종

입력 : 2017-03-24 03:00:00 수정 : 2017-03-23 14: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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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에 위치한 구 러시아공사관.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지금까지도 고종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공사관 뜰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나 초병이 부르는 호각 소리에도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1896년 9월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던 러시아 공무원 포코틸로프는 러시아공사관에서 생활하고 있는 고종의 모습을 이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고종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2월 경복궁을 벗어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였다. 

포코틸로프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지적인 얼굴과 확고한 시선, 품위 있는 분위기 등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그는 “이 사람은 주위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번역·출간한 ‘러시아 시선에 비친 근대 한국’은 포코틸로프의 보고서처럼 1895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방문했던 러시아인들의 기록을 모은 책이다.

책에 실린 첫 번째 기록은 러시아공사관과 덕수궁 석조전을 설계한 건축가 사바틴의 편지다. 사바틴은 을미사변의 정황을 글로 남겼는데, 궁녀들이 일본인의 겁박에도 소리를 내지 않고 저항하는 자세에 놀랐다고 밝혔다.

1900년 조선을 돌아본 러시아인의 여행기도 흥미롭다. 여행기의 저자인 시미트 교수는 “조선은 점토로 만든 초가집의 나라, 오직 구리로만 만든 돈을 사용하는 나라, 쌀만 먹고 짚신을 신는 나라, 설탕도 비누도 모르는 나라”라면서도 “넉 달 동안 100군데 이상의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동냥을 구하는 가난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또 1919년 러시아 총영사였던 류트샤는 3·1 운동에 대해 “2시 정각 서울 전체와 여러 도시에 독립을 알리는 선포문이 뿌려졌다”며 “시위대가 강제로 들어간 궁궐에서는 일본의 박해와 조선의 독립에 대한 선동적인 말들이 쏟아졌다”고 설명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이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후기를 통해 “러시아인들은 다른 서구 사람들과 달리 조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면서 “러시아는 극동 아시아 정세에서 항상 제3자적,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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