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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갤러리] 추함엔 삶의 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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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07 22:07:19 수정 : 2017-04-11 15: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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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뉴엘&살바도르 달리 / ‘안달루시아의 개’
(5월14일까지 서울대미술관 ‘예술만큼 추한’전)
‘안달루시아의 개’는 1928년에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가 공동으로 각본을 맡아 제작된 흑백무성영화다.

눈을 면도칼로 사정없이 자르는 잔인한 장면으로 시작해 이미지들이 비논리적으로 나열되는 단편영화다. 구멍이 난 손바닥에서 개미떼가 기어 나오고, 잘려 나간 채 여전히 움직이는 손목 등의 장면은 매우 무섭고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반문명과 비합리주의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영화로 평가 받고 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일종의 추함에서 느껴지는 것들이다. 미술에서 표현주의적 고뇌나 분노(angst), 초현실주의적 비참함이나 천함(abject)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의문을 갖는다. “왜 작가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리지 않고 추함을 그리느냐.” 이유는 분명하다. 추함 속에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상주의적 절대가 모토였던 서구 르네상스인들에게 고딕은 추한 야만인의 양식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영국인들에게 아프리카는 ‘원시’와 ‘순수’의 추함이었다. 프랑스인들이 현실을 직시한 쿠르베의 그림을 추함 그 자체로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상주의적 편향에서만 추함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작가들이 전략적으로 충격적인 추함을 보여주는 의도가 읽힌다. 본질과 전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세상에 추한 것은 없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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