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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AI·로봇이 사람 대신하는 미래… 배움은 ‘즐거운 유희’로 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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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04 16:00:00 수정 : 2017-03-04 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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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가르침의 시대는 가고, 배움의 시대가 온다 달이 바뀌었다. 2월은 보내지 않아도 가고, 3월은 부르지 않아도 왔다. 하늘에 뜬 달의 가르침 두 가지는 매일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는 삶을 누리라는 것과 밤처럼 어두운 곳이 있으면 빛을 나누라는 것이다. 검은빛의 겨울이 가고, 푸른빛의 봄이 오고 있다. 계절처럼 옷을 갈아입고 달처럼 변화하는 삶을 누리자. 그리고 매일 떠오르는 정열의 태양처럼 열정으로 하루를 시작해 봄 직하지 않은가.

3월은 만세와 함께 다짐하는 달이다. 지금으로부터 98년 전인 1919년, 기미년 3월의 만세는 ‘대한독립만세’였다. 당시는 일제치하로부터 대한의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외침이었지만, 지금은 무슨 만세를 부르며 무엇을 다짐해야 할까. 헌재의 탄핵 결정이 인용이든 기각이든 ‘결과수용만세’를 부르며, 탄핵정국으로 갈라진 두 물결을 하나로 모으도록 온 국민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3월은 또한 배움을 여는 개학(開學)의 달이다. 배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과거의 배움이 어떤 직업에 필요한 학문이나 기술을 닦고 연마하는 일이었다면, AI와 로봇이 거의 모든 일을 대신할 미래의 배움은, 배움 그 자체가 즐거움이자 일이어야 한다. 배움은 본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학교는 배움의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즐거운 누리로 변해야 한다. 


학교의 고유 기능은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가르치다’는 말은, 칼의 고어인 ‘갈(刀)’을 비롯하여, ‘가위(剪)’ ‘가르다(分)’ ‘가루(粉)’ ‘가리다(選擇)’ ‘갈다(磨)’ 등의 단어와 의미상 상통하는 데가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지식 전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말로, 분석하고 선택하는 등의 행위는 가르치는 일에서 꼭 필요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배우다’는 말은 첫째, ‘스며들거나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라는 뜻의 ‘배다(浸透)’와 어원을 같이한다고 본다. 배우면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거나 새로운 기술을 익힘은 물론 남의 행동이나 태도를 본받아 따르게 되며, 나중에는 습관이나 습성이 몸에 붙어 익숙해지면 배움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배우다’는 말 속에는 ‘배 속에 아이나 새끼를 가지다(胚胎)’ 또는 ‘식물의 줄기 속에 이삭이 생기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배다’와도 의미상 서로 통한다. 배우면 없던 지식이나 교양이 새로 생기고, 나중에는 지혜의 싹이 배움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한자어로 ‘가르침’은 ‘교육(敎育)’이고, ‘배움’은 ‘학습(學習)’이다.

교육에서 ‘가르칠 교(敎)’ 자는 정신적 가르침을, ‘기를 육(育)’ 자는 육체적 가르침을 뜻한다. ‘교(敎)’ 자를 보면 제자가 억지로라도 공부하도록 만들기 위해 교사가 교편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 현장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하겠다. 손에 교편을 들고 있는 모습은 ‘칠 복(?)’ 자로, 발음이 때리는 소리를 본뜬 /복/인 것만으로도 무섭게 느껴진다. 하기야 19세기까지만 해도 문자는 특수 계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또 문자를 통해서 권력을 얻을 수 있었으니, 제자나 자식의 미래를 위해 매를 듦 직도 했겠다. 자신의 발전을 위해 스승께 매를 자청하기도 했으니, ‘고칠 개(改)’ 자가 바로 그것이다. ‘민첩할 민(敏)’ 자를 보면 어미의 등에 업혀 다닐 때부터 혼나며 컸음을 알 수 있다. ‘맹자’에 이르기를, ‘사람에게 살아가는 도리가 있으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하게 살되 가르침이 없으면 새나 짐승에 가깝다(人之有道也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라고 했다.

‘기를 육(育)’ 자는 본래 산모가 아기를 낳아 씻으며 기르는 모습인 ‘기를 육(毓)’에서 왔다. 그러나 지금의 육(育) 자는 아들 자(子)의 역형 밑에 발음을 뜻하는 ‘고기 육(肉)’의 생략형인 ‘육(?)’을 붙여서, 마치 자식에게 고기를 먹여 건강하게 기르는 모습으로 보인다. 발음상 ‘기를 육(育)’과 ‘고기 육(肉)’은 같다. 손에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모습인 ‘있을 유(有)’ 자도 발음이 비슷하다.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는 말이 있다. 몸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몸이 가장 귀하다는 말이다. 결국 건강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다.


학습(學習)에서 ‘배울 학(學)’의 본뜻은 ‘학교 건물’이었다.

갑골문에서는 두 손으로 큰 집의 지붕을 엮는 모양인데, 금문에 와서 ‘아들 자(子)’ 자를 넣어 어릴 때부터 배움에 힘써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맹자’에 의하면, 지방학교를 가리켜 하나라에서는 ‘교(校)’, 은나라에서는 ‘서(序)’, 주나라에서는 ‘상(庠)’이라 부르고, 국립학교는 하·은·주 삼대가 모두 ‘학(學)’이라 불렀으며,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는 곳이라 했다. 인문학 부재의 현실을 생각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배움의 목적은 깨달음에 있다. 그리하여 ‘배울 학(學)’에서 ‘깨달을 각(覺)’ 자를 만들어냈다.

‘익힐 습(習)’ 자를 보면 낮에 하늘을 나는 새의 두 날갯짓이 보인다. 여기에서 ‘되풀이하여 행하다’의 의미가 나온다. 원래 ‘습(習)’ 자 밑에는 ‘날 일(日)’이 붙어 있었으나 소전에 와서 ‘사뢸 백(白)’으로 바뀌었다. <논어> 학이편에 ‘여조삭비(如鳥數飛)’라는 말이 나온다. ‘새가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이 배움은 쉬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하기야 나는 새가 날갯짓을 멈추면 떨어져 죽고 말겠지.

영어에서 ‘학습하다’를 뜻하는 말로 ‘study’와 ‘learn’이 있다. ‘study’의 뜻은 ‘학(學)’ 또는 ‘공부하다’에 가깝고, ‘learn’의 뜻은 ‘습(習)’ 또는 ‘익히다’에 가깝다. 어원으로 보면 ‘study’는 한곳에 얼마간 ‘머물며(stay)’ 책을 읽거나 메모하는 등의 일시적 활동을 뜻하고, ‘learn’은 한곳에 오랫동안(long) 의지하면서(lean) 지식이나 기술을 얻음을 뜻한다.

개학과 더불어 진학한 학생은 새 학교를 만나고, 진급한 학생은 새 교실을 만났다. 새로운 환경에 새 선생님, 새 친구, 새 학습 내용과 함께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높아가는 부모님의 기대 등등, 적응이 쉽지 않다. 그래서 ‘개학 증후군’이란 말까지 생겼다.

문제는 개학 증후군에 있지 않고, ‘가르침 시대의 종말’에 있다. 많은 교사가 미국의 화학교사 존 버그먼이 창시한 ‘거꾸로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기존의 학교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꼭 필요한 기관이었지만, 지금은 아무 데서나 학생 스스로 선택적으로 배울 수 있으므로 학교 무용론이 대두하고 있다. 그리하여 학교는 교육의 장에서 교제의 장으로, 등수의 장에서 스펙의 장으로 바뀌고 있다.

돌이켜보면 생존을 위한 활동 요령을 체화하는 것이 교육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문자를 발명하고 나서, 이를 수단으로 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수월하게 가르치고 배워 왔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문자 대신에 이미지를, 최근에는 이미지 대신에 동영상을 교육의 주된 도구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선생님은 한 번밖에 가르쳐주지 않지만, 동영상은 언제 어디서나 선택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이것이 학교가 위기에 빠지는 이유이다. 인강이 편하고 쉬운데, 굳이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해 가면서 학교에 다닐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 친구의 아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3년간 학교에서 공부할 내용을 단 1년의 인강으로 학습하고, 일류대학에 최연소 입학하여 현재 재학 중이다.

가르침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배움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지금이야말로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이다.

권상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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