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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와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 ‘절절’

입력 : 2017-02-23 21:41:05 수정 : 2017-02-23 21: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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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세 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 누구나 자신을 호위하는 빛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어둠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 빛은 주변의 사물에 깃들어 있다가 찰나에 일어나 대상을 감싸며 위로한다. 존재 그 자체를, 부재하지 않는 현존을 비추어 증명하는 조명이다. 적어도 소설가 조해진(41)에게 빛은 그러하다. 그가 최근 펴낸 세 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창비)에 등장하는 인물들, 부재와 소멸의 쓸쓸함을 견디어야 하는 그들이야말로 그 빛이 절박한 존재들이다.

“또 하나의 부재를 감당하게 될까봐, 온몸을 내던져 부딪힐 장벽도 없이 그 어쩔 수 없는 부재에 잠식될까봐 저는 무서웠습니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소설집을 펴낸 조해진. 그는 “소설을 쓰는 내 삶에 고맙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재문 기자
서른살 때부터 이십년 가까이 해왔던 대학 강의를 그만두면서 수입은 제로가 됐고 어머니 병원비와 은행 빚에 쪼들려 생의 막바지 골목에 몰린 전직 철학과 강사.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중국인 유학생 메이린. 메이린은 유럽으로 다시 유학을 떠난 뒤 수년에 걸쳐 그녀가 라오스(老師)라고 부르는 강사에게 지속적으로 메일을 보내온다.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 여자가 소멸했을까봐, 그 부재를 견디는 게 미리 무서울 것 같아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메아리 없는 편지를 쓰고 또 썼다는 고백이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9편 중 조해진에게 이효석문학상을 안겨주었던 단편 ‘산책자의 행복’이다.

부재와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은 ‘사물과의 작별’에서도 도드라진다. 조작된 유학생간첩단의 희생자 ‘서군’을 등장시킨 이야기로 국가의 폭력을 말하는 듯하지만 기실 그것은 전경(前景)이 아니라 사라진 것들의 무덤에 대해 말하는 배경의 기능이 더 크다. 청계천변 ‘태영음반사’를 지키던 여고생과 손님으로 들러 알게 된 재일교포 유학생 서군, 그가 잠시 맡겼던 원고 뭉치를 들고 그이 학교를 찾아갔다가 엉뚱한 이에게 원고를 넘긴 일을 여고생은 생애 내내 괴로워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고모는 서군이 자신 때문에 체포됐다는 자괴감으로 스스로 전 생애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서군을 향한 고모의 영토는 “국경도 여권도 없는 땅, 이민과 망명이 봉쇄된 독재의 나라, 아름답지도 않고 따뜻한 적도 없던 불모의 유형지”였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그 고모가 옥중의 서군에 주려고 마련했던 가방은 끝내 전달되지 못한 채 유실물로 남았다. 서군이나 고모나 모두 결국 작가에게는 유실물 같은 존재들일까. “유실물센터는 세계의 그 어떤 곳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공간이며 동시에, 이 세계를 구성하는 데 없어도 무방한 덧없는 조각일 뿐”이라는 허무가 서늘하다.

‘문주’에도 근원을 알 수 없는 유실물 같은 떠돌이가 등장한다. 문주라는 여자아이가 여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돼서 극작가로 살다가 그녀를 모델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에 초청돼 서른 살이 넘어 한국에 왔다. 청량리역 인근 철로에 버려진 아이를 기관사가 급정거해 구해내 문주라는 이름을 지어줘 데리고 있다가 보육원에 보냈다. 한국 동북지방 사투리로 문주는 ‘먼지’라는 의미라는데 먼지 같은 존재인 그녀의 “끊임없이 내벽에 상처를 덧내며 시간과 함께 공처럼 굴려왔을 어떤 마음”이 저리다. ‘무연고자의 묘비’ 뒷면에 새기면 적절할 마음이다.

표제작 ‘빛의 호위’야말로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빛나는 호위 대상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작중 표현은 의사의 업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살림을 당해본 사람만이, 그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다시 그 행위를 돌려줄 수 있는 성스러운 행위에 대한 표현이다. 분쟁지역에 전 재산을 털어 트럭을 장만해 뛰어들어 부상자를 구호하다 죽은 유대인 아들을 어설프게 포장하는 걸 거부한 어머니. 그녀는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뭐랄까, 나에겐 천진한 기만”이라며 그것은 “알려 했다면 알았을 것들을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야 자신은 몰랐으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말미에 수록한 ‘작은 사람들의 노래’에도 “모든 걸 알고도 모른 척하며 노래 따위나 불렀던 그들”이 등장하거니와 어둠 속에서 빛을 감추고 부인하는 관성은 역설적으로 간절하고 당당한 빛의 호위를 갈망하게 한다. 조해진은 “한 사람의 생애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표현되는 순간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이야기 너머로 뻗어가는 지평에 수많은 문장과 생각과 감정이 흩어졌다가 모이며 또 하나의 작은 길이 되어가는 상상은, 언제나 두려울 정도로 매혹적이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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