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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33〉불안했던 민초들이 마음으로 세운 절

입력 : 2017-02-19 13:06:04 수정 : 2017-02-19 1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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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 염원한 비보사찰… 절망 빠진 백성들 희망 되다
간혹 절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면 새벽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에 잠을 깬다. 잠귀가 밝은 이들은 스님들의 잔잔한 ‘도량석’ 소리에 눈을 뜨기도 한다. 도량석은 스님들이 새벽 2시경 도량을 구석구석 돌며 ‘신묘장구대다라니’ 등을 독송하는 것으로, 잠들어 있는 천지만물을 깨우는 동시에 절 주변의 잡스러운 기운을 몰아내는 의식이다. 이를 통해 일체 중생은 미혹에서 깨어나고, 어둠을 틈타 절에 들어와 있던 잡귀들은 절 밖으로 쫓겨난다고 한다.

새벽잠이 많은 필자는 딱 한번 도량석을 볼 기회가 있었다. 몇해 전 청도 운문사에서 1박을 하던 중 나지막한 염송 소리에 잠이 깬 것이다. 살며시 방문을 여니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절 구석구석을 돌며 목탁에 맞춰 독송을 하고 있었다. 청아한 염송을 들으며, 누군가가 나와 내가 머무르는 공간을 청정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은 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때 느낀 어둠 속의 평온함은 지금까지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불교에는 청정한 기운을 지키고 음습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전해진다. 새벽 도량석이 한 사찰을 청정하게 지키는 의식이라면, 한 고을 내지 한 나라를 청정하게 하는 방법으로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을 세우는 것이 있다. 삿된 기운이 많이 모이는 곳에 사찰을 지음으로써 한 도시의 기운은 물론 나아가 나라의 기운까지 맑게 한다는 의미이다. 나쁜 기운들이 모이거나 들어오는 입구에 청정한 상징물을 배치함으로써 삿된 기운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정한 한양의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한 곳인 삼막사 전경. 네 곳의 비보사찰 중 삼막사와 승가사, 백련사는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새 도읍에 만다라의 의미를 담다

서울 또한 이러한 결계(結界)의 도시였다. 한양이 조선의 새 도읍으로 정해진 후 네 곳의 사찰이 한양을 수호하는 비보사찰로 정해졌다. 1927년경에 쓰인 ‘봉은사본말사지’에는 조선이 개국 후 한양으로 천도할 때 무학대사가 한양을 둘러싼 동서남북 네 곳의 사찰을 비보사찰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한다. 여기에는 무학이 한양을 둘러싼 네 곳의 사찰을 지정해 삿된 기운을 제압하고 조선의 수도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장치로 삼았다고 하였다. 또한 동서남북 사방의 성스러운 상징물이 하나의 공간을 수호하고 나아가 그 공간에 미치는 우주의 기운을 청정하게 에워싸는 만다라의 의미를 한양에 담았다고 기록돼 있다.

◆세 절은 그 자리… 청련사는 장흥으로

무학대사가 정한 한양의 네 비보사찰은 동쪽의 청련사, 서쪽의 백련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이다. 이 가운데 청련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절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신라 고찰인 청련사는 조계종과 태고종 간의 소유권 다툼으로 오랜 내홍을 겪다가 2009년에 건설회사에 매각된 후 아파트촌이 되고 말았다. 절을 지켜왔던 태고종 승려들은 절을 지금의 장흥으로 이건했다. 청련사가 위치해 있던 왕십리나 청련사 뒤편의 무학봉, 그리고 청련사라는 사찰명은 모두 무학과 관련된 이름이다. 왕십리는 무학이 도읍을 정하기 위해 한양을 헤매던 중 어느 노파가 여기에서 10리만 더 들어가면 좋은 터가 나타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고, 청련사 뒤편 봉우리는 무학이 터를 잡은 곳이라 해서 무학봉이며, 청련사라는 사찰명은 무학이 절을 지을 때 절 마당에서 푸른 연꽃이 피어났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의 수호사찰인 백련사는 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창건한 절로, 조선 초에 무학이 제자 함허에게 명하여 중창한 사찰로 전해진다. 서대문 밖 백련산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의 원찰이었으며 조선 후기까지 왕실의 기도처로 이어졌다. 
승가사 마애불.
북쪽의 수호사찰인 승가사는 북한산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서울이 도읍으로 정해지기 훨씬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유서 깊은 절이었다. 승가사는 한때 고려 현종이 피신을 했던 인연으로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크게 중창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 한양 천도가 이루어진 뒤부터는 500년 내내 왕실의 대표적인 기도처로 이용되었다. 태종과 소헌왕후가 병들었을 때 왕실의 구병기도가 이루어졌으며, 세종의 생일날에도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수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서울 남쪽을 수호하는 삼막사는 비보사찰로 정해졌다고 하기에는 지나치리만치 아름다운 절이다. 맑은 날에는 서해바다가 보일 정도로 확 트인 전망을 지니고 있으며, 절을 둘러싼 산림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찬란한 빛을 자랑한다. 삼막(三幕)이라는 절 이름은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고승이 장막을 치고 수도를 한 곳이라는 의미다.

네 사찰 모두 서울 근교의 가장 아름다운 절로 꼽는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승한 경관을 갖고 있었다. ‘봉은본말사지’에는 이들 네 곳이 4대 비보사찰로 기록되어 있지만, 불암사가 동쪽의 수호사찰이었다거나 진관사가 서쪽의 수호사찰이었다는 등의 이설도 전해지고 있다.

◆무학이 조선민중에게 인기를 끈 까닭은?

그런데 정말 무학대사가 네 곳의 비보사찰을 지정했을까. 이 같은 의문은 ‘봉은본말사지’가 일제강점기에 쓰인 책인 데다가 이 사료를 제외하고는 네 절과 무학의 관련성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종종 제기되곤 한다. 더구나 네 사찰들은 한양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수승한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던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 풍수와 관련된 글에는 무학과 관련된 수많은 설화들이 전승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설화들은 무학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무학은 흔히 풍수지리에 해박한 승려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고려 말의 촉망받는 선승(禪僧)이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에도 후보지 물색 과정에 무학이 함께 동참하기는 했지만 무학이 결정적으로 한양을 지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인물을 무학이라 믿어왔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무학은 조선 최초의 왕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생존시에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다. 되레 당시 불교계의 주류들은 무학을 이성계와 결탁해 권력을 추구한 승려로 폄하했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유학자들은 왕을 혹세무민하게 만드는 요승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평가와는 상관없이 민중에게 있어서 무학은 가장 인기 있는 승려였다. 무학골, 무학재, 무학봉, 망우리, 선바위 등 한양을 둘러싼 온갖 야담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 무학이라는 점은 조선시대 내내 민중에게 무학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의 민중은 한양이 무학에 의해 조성된 도시이며, 무학이 남긴 네 곳의 사찰이 한양을 수호하는 신비한 성지라 믿어왔다.

◆조정 못 믿은 불안한 민중 무학 불러내

신화나 전설, 민담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거나 변형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곳에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 즉 민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학의 설화가 많이 만들어진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였다. 국토가 유린당하는 동안 도망치기 바빴던 왕실과 위정자들의 무능을 목도한 백성들은 조선 초 유학자들이 무학이라는 신이(神異)한 승려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도시를 구획했기 때문에 전란이 일어났으며, 수도 방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불에 탄 궁궐터만 남은 한양에서 다시 살아가야 했던 이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찾아야만 했다. 조정을 믿을 수 없었던 조선의 민중이 무학의 설화를 생성한 배경에는 그들의 불안함을 지켜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싶은 염원이 있었을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했던 조선 민초들의 마음, 그 애타는 마음들이 모여 한양의 비보사찰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을까.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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