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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고개 아리랑'-국가의 토지강탈 의혹 사건] 박정희 정권에 뺏긴 8만여 평…"진실은 알고 싶어요"

입력 : 2017-02-12 19:04:17 수정 : 2017-02-14 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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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손 故 이갑수씨 4녀 이상연씨 부부의 눈물 "잃어버린 땅 찾을 순 없어도… 진실은 알고 싶어요"/ 영응대군 후손의 '쑥고개 아리랑' / 일부 육영재단·구국봉사단 등 최태민 일가로 유입 가능성
지난 3일 영응대군 16대손 이갑수씨의 4녀 이상연씨(앞)와 남편 송세관씨 부부가 서울 관악구에 있는 한 건물에서 쑥고개 일대를 회한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남제현 기자
조선 영응대군 16대손 이갑수(작고·서울대 의대 2대 학장)씨의 후손인 이상연씨와 남편 송세관씨 부부는 1960, 70년대 서울 관악구 쑥고개 일대를 국가에 빼앗겼고, 이 과정에서 불법과 인권 유린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 토지가 매매를 거쳐 육영재단이나 구국선교단 등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새로운 의혹도 제기했다.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헌법(제23조)에 보장된 개인의 재산권을 국가권력이 유린했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뿌리를 추적할 단초가 된다. 현재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씨가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경제공동체’라는 취지에서 최씨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을 수사 중이다. 세계일보는 이에 지난달 10일 송씨를 처음 만난 이후 수차례 더 만나 구체적인 사연을 듣고 전문가와 관계자 인터뷰, 공식문서 확인 등을 통해 사실의 확인과 검증을 시도했다.


고갯길 가운데에 서자 눈이 팽팽 돌아갔다. 차들은 앞뒤에서 반대 방향으로 쌩쌩 달리고, 사면에 연립주택과 아파트가 빽빽하게 자리했다. 시선을 고정하자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웅웅거리며 몰려왔다. 나이가 지긋한 부부는 지켜야 할 명예가 있는 듯 조심조심 내려가고, 젊은 부부는 아직 사랑을 믿는 듯 손을 잡고 정류장 쪽으로 향한다. 한 남자 대학생은 아파트 신축현장을 지나 숨을 몰아 달려오고….

서울 관악구 봉천8동에서 신림2동으로 넘어가는 오르막길, 이른바 ‘쑥고개’에 펼쳐진 풍경의 한 자락이다. 지금이야 빽빽한 주택지이지만 옛날 이 일대에는 소나무가 울창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곳에 가마를 놓고 숯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지난 2일 서울 관악구에 있는 쑥고개에서 아파트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사진=남제현 기자

“한번쯤 울음을 터뜨릴 때면/ 살은 다 빼어 버리고/ 뼈만 남아/ 뜨거운 불을 그리워하며/ 숯이 되어 앉는다”(허금주의 ‘숯’ 중에서)

지난 3일 오전, 처음 ‘숯고개’라 불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변한 쑥고개에 섰다. 많은 소나무가, 그 소나무를 구워 만든 숯의 이미지가 하늘에서 맴돈다. 백발의 아내와 함께 이곳을 찾은 그는 눈속으로 모든 걸 집어넣으려는 듯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재산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시효(민법상 개인 간 부동산 거래는 10년)가 끝나 돌려받을 수도 없어요. 저는 다만 진실이라도 확인받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장인인 이갑수(1950년 작고·전 서울대 의대 학장)씨 소유의 이 쑥고개 일대(옛날 ‘시흥군 봉천리 산 174’ 지역·28정보 8만4000여평)를 국가에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4녀 이상연(80)씨의 남편인 송세관(81) 목사의 얘기다. 
지난 2일 한 시민이 서울 관악구에 있는 가파른 쑥고개길을 올라가고 있다. 남제현 기자

이씨는 조선시대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 이염(李琰·1434∼1467)의 16대손으로, 한국 근대 생리학의 태두로 평가된다.

공식 문서에는 1894년 태어나 6·25전쟁 와중인 1950년 7월16일 북측에 피랍,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다.

송씨는 “박정희 정권 당시 국가가 공권력을 이용해 작고한 장인의 쑥고개 일대의 땅을 강탈했고, 이 과정에서 불법과 인권유린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는 1978년부터 소유권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1979년), 대법원(1981년)까지 모두 패했다. 이와 함께 1982년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에게 진정했지만 소용없었고, 2006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지만 좌절됐다.


하지만 취재팀이 최근 만난 전문가들은 문제가 된 쑥고개 일대는 소송 전후 이씨와 이씨 자손 소유로 보인다고 분석한다. 대법원 등기과장을 역임한 주명식(82) 법무사는 “등기부와 지적도, 민법 등을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문제의 발단이 된 1945년 8월 분할등기에 이씨의 소유권 기재가 누락된 건 큰 하자이지만, 등기부상 1945년 2월 부동산 매매가 체결된 것으로 기록돼 이씨의 소유권은 부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송씨는 빼앗긴 토지의 매매 자금이 최태민·최순실 일가의 전횡 의혹이 제기된 육영재단이나 구국봉사단 등으로 흘러갔다고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강탈한 토지를 자금화해 최태민 및 최순실 일가가 전횡한 것으로 알려진 육영재단, 구국봉사단(대한구국선교단의 후신이자 새마음봉사단 전신) 등의 설립 및 운영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송씨의 사연은 구구했고, 증언 속에 전해오는 심정은 절절했다.

#대지주인 영응대군 16대손 이갑수

박정희 정권에 의해 불법적으로 빼앗겼다는 이갑수씨의 쑥고개 일대는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 영등포구로 포함되기 전에는 경기도 시흥군 소속이었다. 옛날 지번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산 174’. 이씨가 이곳의 소유주였다는 첫 공식 기록은 1922년 조선총독부 기록에서 발견된다. 조선총독부의 임야조사위원회 공문이 담긴 1922년 10월 3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제3044호)에는 이곳의 소유자가 이씨로 기재돼 있다.

이갑수.
일제강점기에 이씨는 ‘대한민국 경찰의 아버지’로 불리는 창랑 장택상(1893∼1969) 전 총리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땅이 많았다. 서울은 물론 황해도 사리원, 경기도의 장단과 평택, 시흥, 경북 칠곡군 일대에 어마어마한 토지를 보유했다. 심지어 “이씨의 땅을 밟지 않으면 평택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1985년 발간한 ‘농지개혁사료집자료X’에 수록된 ‘일제하 대지주 명부’를 확인한 결과 이씨는 논과 밭을 69정(町·1정은 9918㎡로, 약 3000평 규모)이나 보유했고, 소작인만 190명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이씨의 엄청난 부동산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문종으로부터 왕실 ‘내탕고’의 보물을 하사받은 16대 조상인 세종대왕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 이염 이래 내려온 것으로, 1923년 작고한 한말 법조인인 아버지 이종성씨에게서 상속받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 쑥고개 일대 지역은 더 이상 이씨나 이씨 후손의 땅이 아니다. 쑥고개 일대에 대한 등기부등본을 떼어 살펴본 결과 이 일대는 ‘봉천동 산 174-51’ ‘봉천동 918-8’ 등 수백, 수천개의 지번으로 쪼개져 다양한 이들이 소유하고 있다.

#일제 견제로 17년 뒤에야 보존등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씨의 아버지 이종성씨는 1923년 사망하지만, 봉천리 산 174번지의 쑥고개 일대는 곧바로 이씨 소유로 등기가 이뤄지지 못했다. ‘봉천리 산 174’와 ‘봉천리 산 174-1’, ‘봉천리 산 174-9’ 등 쑥고개 일대의 이전 지번의 등기부등본을 떼어 분석한 결과 이씨는 1940년 9월 12일에야 봉천리 산 174번지에 대한 보존등기를 할 수 있었다.
경기 시흥군 봉천리 산174-9의 토지등기부에서 1969년 9월 11일과 10월 11일자로 기록된 박모씨의 이름이 초서로 부실 기재돼있다.

이씨의 후손들은 이에 대해 “이씨의 아버지 이종성씨가 한말 법조인으로, 독립군에 자금지원을 하다 일제에 발각되면서 일제의 철저한 통제를 받게 됐다. 그래서 이종성씨가 1923년 작고했지만 이때야 소유권 이전등기를 받아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봉천리 산 174번지는 이어 1941년 4월 8일 이씨를 포함한 전주이씨 영응대군 종중으로 소유권이 이전(등기)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씨는 1945년 2월 5일 영응대군 종중으로부터 당시 일본 돈으로 800엔이라는 거금을 주고 이 땅을 매입한 뒤 해방 이후인 1945년 8월 27, 28일 소유권 이전등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이씨 작고 이후 오랫동안 부동산 관리 안 돼

봉천리 산 174번지는 1945년 8월 27, 28일 ‘봉천리 산 174-2∼9번지’로 분할등기된다. 그런데 이때 분할등기는 소유권 이전등기보다 선순위로 돼 있고 ‘봉천리 산 174-1∼5번지’는 ‘이갑수’로 소유권이 이전된 반면 ‘봉천리 산 174-6∼9번지’는 그렇게 표시되지 않는다. 즉 종중 소유가 유지된 것으로 표시된 셈이다. 이에 따라 1960년대 후반부터 이씨가 아닌 종중 명의로 소유권이 기재된 땅(봉천리 산 174-6∼9번지)은 집중적으로 팔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씨는 이후 1950년 7월 16일 북측에 납치된 뒤 각종 기록에 이때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다. 그의 사망으로 보유 토지는 당시 민법의 ‘장자상속제’에 따라 장남 이상권(1979년 사망)씨 소유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씨 소유의 토지는 1970년대 중반까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됐다. 경기고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상권씨는 6·25전쟁 당시 학병으로 지원해 군에 근무하다 제대한 뒤 일본에서 생활했고 자신의 재산 관련 변동사항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1973년쯤 아산만 방조제 공사에 자신의 토지가 일부 포함되면서 평택 농촌진흥청이 수용에 따른 보상금을 받아가라고 할 때 잠시 귀국해 보상금만 수령해 갔을 뿐이다.

이씨 자손들은 아버지 이갑수씨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교류도 끊겼고 재산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이씨의 또다른 후손은 지난달 26일 취재팀과 만나 “이씨의 형제자매 간 교류는 거의 없었고, 지금도 서로의 처지를 거의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 사이 쑥고개 일대는 1963년 1월 서울 영등포구로 편입된 뒤 1973년에는 영등포구에서 분리돼 관악구로 편입됐다. 아울러 1960년대부터 분할이 계속되면서 봉천리 산 174번지는 수백, 수천개의 지번으로 쪼개지고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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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토지 강탈 제보

1974년 4월 말 이갑수씨의 4녀 이상연씨가 살고 있던 서울 영등포의 한 아파트. 정장을 한 한모씨와 윤모씨 두 사람이 아파트 앞에서 서성거렸다. 문을 열리자 두 사람은 반가운 듯 입을 열었다. 한씨는 50대, 윤씨는 30대로 보였다.

“아이고, 이상연씨를 1년 반이나 찾았습니다. 이제야 만나게 됐네요. 집으로 들어가 조용히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송씨와 이상연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뒤 놀라운 얘기를 털어놨다. 즉 모 국가기관이 자신들을 이용해 서류를 위조하고 이씨와 그 후손의 땅을 가로채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5000원짜리 신권이 가득 담긴 007가방을 보여준 뒤 “토지를 곧바로 되찾을 수 있으니 소송을 우리에게 위임하면 이 돈을 바로 주겠다”고 말했다. 송씨 부부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돈을 받지 않았고, 일주일 후 다시 오기로 한 두 사람은 오지 않았다.

송씨는 “두 사람은 쑥고개 토지 강탈과정에 참여한 이들이었지만 ‘작업’에 참여한 대가에 대한 불만 때문에 우리를 찾아와 제보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토지 강탈을 처음 알려준 한씨는 1977년 10월 다시 찾아와 “함께 왔던 윤씨는 제보 직후 3년 전에 숨졌고, 나도 귀갓길에 검은 지프가 들이받아 6개월간 입원 후에 퇴원했다”고 ‘공권력의 음모’를 말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소유권 변경 대거 이뤄져

송씨 부부는 깜짝 놀랐다. 곧 변호사를 만나거나 관공서를 찾아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등기부를 확인한 결과 종중 소유로 등기가 돼 있던 쑥고개 땅들이 1969년부터 대거 거래된 것이 드러났다. 예를 들면 ‘봉천리 산 174-9번지’의 경우 1969년 9월 11일 당시 27세의 육군 헌병 하사 박모씨 등이 김모씨와 공동 매입한 것으로 돼 있었다. 종중 소유로 등기된 다른 땅도 모두 소유권자가 바뀌어 있었다.

이갑수씨와 이상권씨가 각각 영응대군 16, 17대 종손으로 이들의 동의나 승낙 없이 ‘종중으로부터 매입했다’는 등기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후손들은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 등기부상 소유권을 이전한 박씨는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직접 종중으로부터 산 게 아니다”며 “친구 권유로 종중으로부터 땅을 샀다는 김모, 윤모씨에게 9000만원에 매입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흥정을 했던 김씨는 60대로, 전혀 모르는 사이”라면서 “그와 종중과의 계약 내용도 전혀 모른다”고 덧붙였다.

송씨는 이후 소유권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1978년)과 2심(1979년), 대법원(1981년)까지 모두 패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공권력의 불법과 인권유린을 맞닥뜨리게 된다.

●영응대군과 그의 16대손 이갑수는 누구

박정희 정권에 쑥고개 일대의 땅을 빼앗겼고 그렇게 확보된 자금이 육영재단, 5·16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 등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주장하는 송세관(81)씨는 땅의 주인이었던 이갑수씨의 4녀 이상연씨의 남편이다.
이갑수

이갑수씨는 한국인 최초의 생리학자로, 김기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의학인물사’에서 그를 “한국 근대의학계의 선각자이자 생리학의 태두”라고 표현했다. 1893년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서 출생한 이씨는 일본 오카야마(岡山) 의학전문학교에서 유학했다.

그는 1930년 심호섭·윤일선 등과 함께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조선의사협회를 창립했고, 1931년 경성제대 의학부 강사로 임명된 뒤 강의시간에 반드시 한복을 입었다고 한다.

이갑수씨의 아버지인 이종성씨도 구한말 ‘강직하기로 이름난’ 변호사로 전해진다. 송씨는 이 변호사에 대해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는 왕실 재산을 총괄했던 분”이라며 “재산이 많아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들에게 돈을 대다 일본에 감시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쑥고개 땅을 포함한 이씨 일가의 막대한 재산은 세종대왕의 여덟번째 아들 영응대군 이염(李琰·1434∼1467)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조실록’ 41권 1467년(세조 13) 2월2일자에 따르면 막내인 영응대군을 매우 사랑한 세종은 내탕고(임금의 사유재산을 관리한 곳간)의 진귀한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모두 주려다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어 문종이 세종의 유지에 따라 내탕고의 모든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내어줬다.

이후 영응대군의 재산은 둘째부인 여산송씨에게로 상당 부분 넘어가지만, 유일한 아들인 청풍군에게도 일부 이어져 전주이씨 영응대군파 16대손인 이갑수씨에게까지 대물림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연씨도 “당시 등기소에서 찾아보니 평택에 우리 땅을 안 밟으면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로 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갑수씨는 1947년부터 서울의대 학장을 지내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학교를 살펴보러 집을 나섰다가 납북돼 사망했다.

이후 구민법상 장자상속제에 따라 장남인 이상권씨에게로 쑥고개 일대 땅을 포함한 유산이 상속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이갑수씨의 또 다른 후손 A씨는 “소송을 하는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봉천동 일대의 할아버지(이갑수씨) 땅을 다 빼앗겼다’는 말을 60년대 말쯤 제사 때 들었다”고 했다.

●쑥고개 일대는 어떤 곳

박정희 정권 당시 빼앗겼다는 이갑수씨 소유의 쑥고개 일대 땅은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곳이다. 쑥고개는 서울 관악구 봉천8동에서 신림2동으로 넘어가던 고개를 말한다. 소나무가 울창해 숯을 굽는 가마로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해 숯고개라 불렸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쑥고개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관악백과사전’ ‘관악, 어제&오늘’ 등에 따르면 1960년대 봉천동 지역이 도심 불량주택 철거 정책으로 발생한 철거민과 한강변 수해로 생겨난 이재민의 정착 단지로 조성되며 쑥고개 일대에도 천막촌과 난민주택이 들어섰다. 이후 1970년부터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되면서 서민 주택난 해결을 위해 주택단지가 조성됐고, 1975년 2월 서울대학교가 신림동으로 이전하며 일대 지역 개발에 불붙기 시작했다.

1984년 가로명 제정 때 관악구청 앞(봉천5동 570-1)에서 도림천(신림2동 94-38)에 이르는 폭 20m, 길이 1400m의 도로가 쑥고개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재개발 필요성이 대두되자 1990년대 본격적으로 재개발이 진행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했다.

특별기획취재팀=김용출·백소용·이우중·임국정 기자 kimgija@segye.com
영상편집=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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