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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희망·사랑…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력 : 2017-02-10 03:00:00 수정 : 2017-02-09 21: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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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12번째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펴내 노래 같은 시를 쓰는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 중 한 명인 정호승(67)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사진)를 펴냈다. 그가 등단 이래 꾸준히 천착해온 슬픔 위에 희망과 용서와 사랑을 다짐하는 시 110편을 수록했다. 영원한 소년 같은 이미지이지만 그이 또한 생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노년에 접어들었음을 고백하는 시편이 먼저 눈에 띈다.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선암사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가/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조금씩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설해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영정 앞에 켜둔 촛불이 가물가물 밤새도록 나를 바라보듯/ 물끄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물끄러미’)

열두 번째 시집을 펴낸 정호승 시인. 그는 “희망은 절망보다 더 무섭다”면서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고 위로를 건넨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당신은 왜 좋은가.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속에는/ 이제 미움도 증오도 없다/ 누가 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사랑보다 연민이 있어서 좋다”고 답한다. 그러한가. 미움도 증오도 없는, 측은한 눈빛으로 이제 바라만 보아도 좋은가. 시인에게 ‘물끄러미’라는 부사는 생의 강변에서 세월의 강물에 오래 마모된 조약돌 같은 질감이다. 오랜 세월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얻지 못할 평화이기도 하다. 그 아늑한 부사 하나만으로도 생의 허기를 때울 수 있을 것 같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늦은 저녁/ 들녘의 풀을 뜯어 먹던 진흙소가/ 노을을 등에 지고/ 외양간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쑤어준 여물을 먹다가/ 물끄러미/ 웃으면서 나를 바라본다/ 나 이 세상 사는 동안/ 더 이상 배고프지 않으리”(‘진흙소’)

이 시집에서 기실 이 같은 평화는 시인이 각고의 인내와 다짐과 고통 속에서 길어 올린 흔치 않은 경지이다. 오히려 자주 절망하고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쉬는 편이다. 시인은 별이 되고 싶었지만 평생 그 별만 바라보는 자신을 돌아본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다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별’) 스스로 별이 되지 못하고 내내 올려다보기만 하는 행위란 밤하늘에 가 닿지 못한 가련한 존재들이 시를 쓰며 더불어 위로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선화가 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겨우내 불을 켜두고/ 문을 열어둔 채 너무 멀리 나왔다/ 수선화의 노란 향기가/ 수의처럼 나를 감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불을 꺼야 한다/ 대문을 닫고/ 우물을 파묻고/ 고요히 홀로/ 수선화의 뿌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아름다운 인간의 구근이 되어/ 기다려도 오지 않는 봄을 또/ 기다려야 한다”(‘수선화를 기다리며’)

정호승 시인에게 ‘수선화’는 그동안 펴낸 시집들을 여일하게 관통하는 꽃이기도 하다. 그에게 수선화는 “꽃 중에서도 죄 없는 꽃”이고 “꽃 중에서도 용서하는 꽃”이다. 아예 시집 제목을 ‘수선화에게’로 뽑은 적도 있다. 암중모색하며 어두운 땅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그 꽃의 뿌리를 떠올리며 시인은 새삼스럽게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봄을 제대로 맞기 위해선 호들갑스러운 말의 성찬이나 위선의 몸짓일랑 걷어치우고 수선화 뿌리처럼 인고의 겸손한 세월을 견디어야 하리라는 다짐이다.

시인의 이러한 자세는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 이번 시집의 표제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와도 맥이 통한다. 오래 걸어온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여전히 ‘희망’이란 명사는 난공불락이다. 그는 “희망은 무섭다/ 희망이 있어도 희망은 무섭다/.../ 절망보다 무섭다”고 설파한다. 어설픈 희망이야말로 절망보다 더 무서운 희망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희망이 간절하기에 시인은 이리 절망 곁을 쉬 떠나지 못하는가.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희망이 있는 희망은 무엇인가, 희망은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무엇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가 하는 고통의 질문을 끊임없이 해보았다”면서 “시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인생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같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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