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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코 속 커닝페이퍼에 대리시험까지… 부정행위 ‘장원급제급’

입력 : 2017-02-03 21:00:00 수정 : 2017-02-03 20: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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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조선 유생들의 과거시험 부정 백태 요즘 우리는 입학, 입사, 승진 등 끝없는 시험 속에서 살고 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은 시험 공화국이다. 시험 하면 종종 논란이 되는 것이 부정행위인데, 이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과거는 시험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던 제도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에 올라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시험 준비에 고군분투했다. 과거시험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한 필수코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과거시험에서도 부정행위가 적지 않았고, 그 폐단 또한 심각했다.


풍속화가 김준근이 그린 그림. 왼쪽은 ‘과장에 들어가는 선비’ 모습이고, 오른쪽 그림은 ‘과거 보러 가는 선비’ 모습이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과거시험의 과열 양상

고려 광종 때 처음 시행한 과거시험은 조선에 와서 더욱 발달했다. 조선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의 구별이 있었다. 또 예비시험의 성격을 지닌 소과(小科), 즉 생원·진사시험도 있었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생원·진사시와 문과가 중시되었고, 많은 선비들은 문과 급제를 최대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문과 시험은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는 식년시(式年試) 외에도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등 다양한 특별시험이 있었다.

조선 후기 특별시험이 점차 늘어나면서 선발인원도 증가했다. 하지만 이를 능가하는 응시자의 증가로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합격자의 나이가 갈수록 높아졌다. 생원·진사시험 합격자의 평균연령이 15세기 25세에서 19세기 후반 37세로 무려 12세나 높아졌다. 문과 합격자의 평균연령이 18세기 후반에 오면 39세로 거의 사십에 육박했다. 생원·진사시험 중 서울에서 시험이 열리는 한성시(漢城試) 응시자가 세종 때 1000여명에서 선조 때 2000여명으로 늘어났고, 다시 인조 때에는 4000여명으로 늘어났다가 숙종 33년에는 1만100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가히 폭발적인 증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정은 문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정기시험인 식년시보다 특별시험의 응시자 증가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았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거시험을 둘러싼 과열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합격을 향한 욕망은 커져갔지만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진 상황에서 부정한 방법을 꿈꾸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박세당(朴世堂) 장원 급제 합격증인 문과 홍패.
장서각 제공
◆부정으로 얼룩진 시험장 풍경

먼저 과장(科場), 즉 시험장 관리의 문란이 과거 부정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원래 유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열흘 전까지 응시생 등록을 하고, 시험 당일에는 출입문 앞에서 옷과 소지품 검사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응시생이 크게 늘어나면서 시험장 관리는 점차 허술해져서 시험장 안에 간식이나 술, 담배를 파는 장사꾼까지 드나든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시험장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먼저 입장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응시생들 간에 치열한 몸싸움이 전개되어 인명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1686년(숙종 12년) 4월에는 숙종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시험을 주관한다는 소문을 들은 선비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시험장에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가 여덟 명이나 밟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과장 문란으로 야기된 과거 부정행위로 당시 자주 거론된 것이 이른바 ‘수종’(隨從)과 ‘협서’(挾書)의 문제였다. 수종은 응시생을 보좌하는 자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함부로 시험장에 들어가서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자주 있었다. 협서는 요즘으로 치면 커닝페이퍼를 말하는데,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부정행위라 할 수 있다.

흔히 행해졌던 부정행위를 또 하나 거론한다면 남의 글을 베끼거나, 아예 대리시험을 보게 하는 것을 말한다. 1566년(명종 21년)에 글자도 잘 모르는 심진(沈鎭)·심자(沈?)·심전(沈銓)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자 성균관에서 그들을 돈 주고 산 생원, 진사라는 뜻의 ‘상가상사’(償價上舍)라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시험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을 뜻하는 ‘조정’(早呈)도 과거시험의 폐단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한다. 과거 응시생이 크게 늘어나자 시험관들이 먼저 제출한 답안지만 채점해서 합격자를 내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자 일부 응시생들은 시험답안을 미리 써온 후 시험장에서 빈자리만 채워 재빨리 제출하거나 앞부분만 제대로 작성하고 뒷부분은 엉터리로 채워 넣는 협잡을 자행하곤 했다.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평생도에 실린 소과 시험장의 응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정 수법도 가지가지

합격을 위해서 때론 기발한 수법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숙종 때 과거 시험장으로 쓰이던 성균관의 반수당(泮水堂)에서 나물을 캐던 여인이 땅속의 새끼줄을 발견했다. 조사 결과 이는 유생과 외부인 간에 시험 문제와 답안지를 주고받기 위해 누군가 땅속에 매설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커닝페이퍼를 몸에 은밀히 지니고 과장에 들어간 사례도 흥미롭다.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면 생원·진사시험에 응시한 자들이 작은 글씨로 깨알같이 종이에 적어 넣은 후 종이를 콧구멍에 숨겨 과장에 들어갔으며, 그래서 커닝페이퍼를 숨긴 콧구멍을 사람들이 의영고(義盈庫)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의영고는 궁중에서 필요한 기름·꿀·과일 등의 물품을 관장하는 관청을 말하는데, 답안 작성에 필요한 각종 자료가 콧구멍에 있다고 해서 이를 풍자한 것이다.

또 시험에 응시할 자격 미달인 유생들이 몰래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1차시험 불합격자가 2차시험에 응시하거나, 혹은 성균관 유생 중에 정해진 학업 일수를 채우지 않은 상태로 관시(館試), 즉 성균관 유생들만이 볼 수 있던 시험에 응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삼년상 중에 과거에 응시하면 장(杖) 80대에 처하도록 하였으나, 삼년상을 끝내기도 전에 시험에 응시해서 문제가 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형벌과 함께 과거시험 응시를 제한하는 정거(停擧) 조치가 있었다. 또 합격자 발표가 이미 끝나서 급제자 명단에 들어갔더라도 추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削科)라 해서 해당자의 과거 급제를 취소하였다. 부정행위가 심각하여 시험 전체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으면 부정행위자 개인에 대한 처벌을 넘어서 파방(罷榜)이라 하여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는 조치가 단행되기도 하였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정쟁, 과거 폐단을 심화시키다

사실 개인이 저지르는 부정행위보다 조직적으로 행해지던 부정이 더 큰 문제였다. 응시자가 권력층과 결탁하거나 시험관과 짬짜미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 후기 정쟁이 격화되면서 각 당파 간에 과거시험을 자파 세력을 심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실제로 1610년(광해군 2년)에 시행된 문과 별시(別試)에서 정권의 실세였던 이이첨(李爾瞻)의 사돈 등 시험관의 친인척들이 대부분 합격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때의 합격자 명단을 적은 책을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방목’(子壻弟姪査頓榜)이라고 비아냥거린 일로 유명하다. 숙종 때에는 과거의 부정행위로 비롯된 대규모의 옥사인 이른바 ‘과옥’(科獄)이 두 차례나 발생하였다. 이런 일들은 과거의 핵심 가치인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과거는 출세의 사다리로서 조선국가가 인재를 등용하는 핵심이다. 하지만 과거가 갖는 순기능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그림자 또한 그 시대의 한 모습이었다. 이화여대 입시부정 문제로 더없이 시끄러운 요즘, 역사를 되짚어보며 효과적이고 공정한 시험 관리 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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