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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위해 고른 한 편의 시와 그림… 위안의 글 쓰면서 되레 나를 치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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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23 20:52:28 수정 : 2017-01-23 22: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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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시를 좋아하세요’ 펴낸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시인이 되고 싶었던 미술관장이 있다.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한 지인에게 매주 한 번씩 좋아하는 시를 문자메시지로 배달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시 큐레이션 서비스’라고나 할까.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위해 많은 시 중에서 한 편의 시를 직접 고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름의 생각까지 담아 보내니 상대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에 기뻐하고 괴로워하는지, 삶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위로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모습까지 드러냈다. 비로소 진정한 이해와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주인공은 참신하고 무게 있는 기획전시로 정평이 나 있는 사비나미술관의 이명옥 관장이다.

“시 배달을 하는 동안 ‘시는 펜티멘토(pentimento·아련히 나타나 보이는 원래의 형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펜티멘토는 유화에서 화가가 덧칠하여 지운 밑그림이나 그 전의 그림들이 나중에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적외선 촬영 등으로 발견되는 사례가 많지요. 화가가 최초에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는지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시(詩) 배달을 통해 감성공유의 글쓰기를 실행하고 있는 이명옥 관장. 그는 “시는 존재의 성찰을 가능케 해줘 몸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를 같게 한다”며 “이로 인해 우리는 나비처럼 훨훨 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시는 긴 세월 동안 그 자신도 몰랐던 그의 진짜 얼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감정들, 깊숙이 숨겨버린 그리운 기억들을 새롭게 끄집어내어 그것을 다시 보고 느끼게 해주었다. 최근 그는 이런 내용들과 함께 그림도 넣은 책 ‘시를 좋아하세요…’(이봄)를 펴냈다.

“이생진 시 ‘초설에게’ 첫 연에 ‘시를 쓴다는 건 낯선 호숫가 벤치에 앉아/ 물속에 빠져버린 하늘을/ 다시 건져 올린다는 그 말이 맞아’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시 쓰기는 물에 빠진 하늘을 낚시질로 건져 올리는 일처럼 어리석은 짓이라는 겁니다. 헛되이 수고만 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소득도 얻지 못하는.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시도하지 않는 헛된 일을 시인은 소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해냅니다. 여기서의 하늘은 실제 하늘이면서 꿈과 소망, 그리움을 상징합니다.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성이 없는 것들이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슬프고 삭막하겠어요. 시인들이 헛수고를 마다한다면 삶의 위안을 주는 시는 태어나지 않았겠지요.”

그에게 시란 꿈과 사랑을 찾는 일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케 해주는 소중한 존재다. 그는 시에 그림을 더했다. 이생진 시엔 푸른색조가 감도는 화가 정병국의 그림을 매치시켰다. 한 남자가 홀로 해변 모래밭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등 뒤엔 꽃다발이 놓여 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꽃다발을 차마 건네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미술이란 근본적으로 인간의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움이란 여기에 있지 않다는 애석함과 보고 싶다는 애틋함이 함께 빚어내는 긴장을 말합니다. 그만큼 그리움은 항상 이미지로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림이지요. 그래서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가는 가운데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비로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자신을 맡길 때 그림은 시작되지요.”

결국 그림속 꽃다발은 그리움을 의미한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알고 싶은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누군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림 감상자도 마찬가지다.

이 관장은 늦은 밤 반려견 두 마리와 함께 산에 인접한 공터로 산책을 나간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다. 이럴 땐 권대웅의 시 ‘아득한 한 뼘’을 떠올려 본다.

“공감각적인 시어로 사랑의 감정을 애틋하게 표현해서 좋아해요. 달팽이가 은하수를 건너가고(속도의 고요함이 느껴지세요?), 오래된 그리움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오른다는(먹음직스럽게 부풀어 오른 따뜻한 빵을 떠올려 보세요) 시어는 시각과 촉각, 미각을 자극하지요.”

그는 시 속 그리워하는 이는 저세상으로 떠난 연인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이 생 너머 저 생’이라는 시어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시 속 세계는 이승과 저승이 공존하는 초월의 공간입니다. 이승과 저승이 아득한 거리가 한 뼘 가까운 거리로 줄어들기도, 무한대로 늘어지기도 합니다. 우주공간을 아득히 늘리기도, 한 뼘 길이로 줄이기도 하는 경이로운 능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임을 향한 그리움에서 나오겠지요. 연인과 함께 달을 보며 사랑을 나누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겠지요. 둥근 달을 주례로 모시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 겁니다.”

시인만큼이나 달을 사랑한 예술가가 러시아 설치미술가 레오니트 티시코프(Leonid Tishkov)다. 티시코프는 반투명 합성 소재로 만든 초승달을 북극 등에 설치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다. 위태로우면서도 날렵하고 우아한 고혹적인 미에 반했다.

“어쩌면 고독한 예술가에게 달은 위로의 빛입니다. 작가는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동화와 시를 되찾아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을 찾아다니면 달을 설치하는 이유죠.”

그는 오지 않은 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다가 기어이 눈물을 쏟고, 그 눈물이 앞을 가려 해당화 꽃이 여러 겹으로 비쳐 보인다는 한용운의 시 ‘해당화’의 마지막 구절도 애송한다.

“사랑에 빠진 여심 그 자체였어요. 저는 지금껏 알고 있던 만해와는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이 시에 흥미를 갖게 되었죠.”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이인성도 감명을 받아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렸을 정도다. 이인성은 만해를 무척 존경했다고 한다. 1944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난 만해를 기리고자 그린 그림이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라 만해를 향한 존경심의 강도를 말해준다.

최동호의 시 ‘히말라야의 독수리들’은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과 나란히 했다. 작품 제목은 ‘아른하임의 영토’다. 19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눈 덮인 산의 형세가 거대한 독수리 모습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림에 가장 적절한 제목은 시적인 것이다. 시적인 제목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마법에 빠져들게 한다’고 했어요.”

그는 황인숙의 시 ‘강’과 황동규 시 ‘즐거운 편지’ 등을 술술 암송한다. 개봉관영화를 섭렵하고 주요 공연도 빼놓지 않는다.

“저는 하고 싶었던 화가도 시인도 못 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꿈의 미완이 무언가를 찾아가는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지요. 그런 과정속에서의 글쓰기는 자연스레 상처 난 꿈을 치유하는 약이 됐습니다.”

사실 그는 다양한 포맷으로 미술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서로 유명하다. ‘팜므 파탈’, ‘그림 읽는 CEO’,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등이 대표적이다.

“시 배달을 하면서 가장 큰 소득은 대화체의 사용이었습니다. 겉멋을 부리거나 강한 주장을 하기 위해 힘이 들어간 기존의 글을 탈피하게 된 점이지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글쓰기가 감성공유의 윤횔유가 됐습니다.”

그가 이제 비로소 위안의 글쓰기에 다다른 것이다. 미술의 본령도 필시 이런 것이 아닐까.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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