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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29〉 사부 윤선도 생일에 봉림대군이 보낸 음식들

입력 : 2017-01-13 21:04:27 수정 : 2017-01-13 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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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껏 마련한 왕실 잔치음식으로 스승 생일에 예우 갖춰 인조가 즉위한 지 7년째 되던 1629년 6월21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길을 여덟 명의 남자들이 무엇인가를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창덕궁 동쪽 연지(蓮池)의 남쪽 연화방 골목을 들어서고 있었다. 이윽고 윤선도의 집 대문 앞에 도착한 이들은 공고상(公故床)을 머리에 인 일곱 명의 상노(床奴)들과 그들을 인솔한 관원이었다. 관원이 “이리 오너라”를 외치자, 윤선도 집의 하인이 부리나케 대문을 열었다. 그가 말하기를 오늘이 대군의 사부(師傅)인 윤선도의 생일이라서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께서 음식을 보내라 하여 가져왔단다. 그러자 윤선도와 그의 부인도 한달음에 사랑채의 대청마루로 나섰고, 하인들은 공고상을 받아서 가지런히 놓았다.

공고상을 덮은 보자기를 벗기자, 온갖 음식이 빛을 발했다. 윤선도는 봉림대군이 머무는 동쪽 대군방(大君房)을 향해 큰절을 하고, 한참 동안 황송하여 말을 하지 못했다. 어찌 자신의 생일을 알고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보냈는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윤선도는 글을 아는 하인으로 하여금 대청마루에 놓인 음식들을 차례대로 종이에 적도록 시켰다. 하인이 다 쓰자 윤선도가 그것을 받아 스스로 한자로 “기사년 6월 21일 윤선도 생일에 대군께서 보내주신 것이다. 7명이 머리에 이고 왔고, 1명이 데리고 왔다”고 적었다. 


야외나 관청에서 음식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소반인 공고상. 번상이라고도 한다.
지금부터 선물 하나하나씩을 살펴보자. 첫 번째가 증편이다. 증편은 다른 말로 증병(蒸餠) 혹은 농병(籠餠)이라 부르기도 했다. 1680년대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요록’(要錄)에서는 “흰 멥쌀가루 세 말을 곱게 가루 내어 밤, 대추, 잣 등의 과실을 넣고 또 구기자 술도 함께 섞어서 찐다”고 했다. 보통 막걸리를 넣고 만드는 증편을 두고 윤선도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허균은 서울 사람들이 사계절 내내 증병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역시 윤선도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허준은 그의 저작 ‘동의보감’에서 각종 약재를 가루 낸 다음에 증병에 반죽하여 알약인 환약(丸藥)을 만든다고 했다. 그만큼 일반 집에서의 증편 쓰임새는 여러 가지였다.

두 번째 음식은 절육(졀육)이다. 절육의 한자는 조선시대 왕실 잔치와 관련된 ‘의궤’에서는 ‘절육’(折肉) 혹은 ‘절육’(截肉)이라고 적혀 있다. 이 두 한자 ‘절’은 모두 ‘자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에 고기를 잘라 쌓아올린 음식을 이렇게 적었다. 보통 고기를 뜻하는 ‘육’(肉)은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꿩고기, 닭고기, 심지어 생선도 포함되었다. 온갖 고기가 들어간 절육은 왕실 잔치에서 빠지면 안 되는 음식이었다. 


고문서집성. 1629년 6월 21일 봉림대군이 윤선도의 생일에 보낸 음식을 적은 고문서.
세 번째 음식은 소육(쇼육)이다. 한자는 그대로 해석하면 ‘구운 고기’다. 1771년(영조 47) 서명응이 쓴 ‘고사신서’(攷事新書)에는 소육을 두고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숯불 위에 가로질러 놓는다. 기름, 소금, 장, 양념, 술, 식초에 재웠다가 묽은 풀을 살짝 펴 바르고, 재빨리 손을 놀려 뒤집어 주면서 익을 때까지 구워내고 나서 밀가루 풀을 벗겨낸다”고 했다. 고기의 종류를 말하지 않았지만 쇠고기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소가 노동력으로 쓰여 특별한 날이 아니면 쇠고기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봉림대군이 보낸 소육은 얼마나 대단한 음식인가.

네 번째 음식은 전복탕, 한자로는 추복탕(?卜湯·튜복탕)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날전복을 생복, 통째로 말린 것을 전복, 말리면서 두드려 편 것을 추복 혹은 추복, 전복 살을 박고지처럼 길게 저며 그늘에서 말린 것을 인복 혹은 장인복(長引鰒)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추복탕은 말리면서 두르려 편 추복을 넣고 끓인 탕이다. 그런데 오로지 추복만 넣고 끓였을까. 1719년 9월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 것을 경축하는 의미로 올린 진연을 기록한 ‘진연의궤’에 나오는 추복탕은 어린 닭 한 마리를 푹 곤 다음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다시 추복을 넣고 끓인 후에 잣을 고명으로 올려서 완성했다. 추복탕 역시 왕실 잔치에 반드시 올랐던 음식이었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다섯 번째 음식은 어만두다. 본디 만두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피(皮)를 만들고 그 안에 소를 넣어서 끓는 물에 삶거나 시루에 쪄서 만드는 음식이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밀가루가 풍부하게 생산되지 않아서 생선살을 피로 사용하여 밀가루 반죽의 만두처럼 만드는 어만두가 왕실을 비롯하여 부유층 사이에서 유행했다. 앞서 소개한 숙종 때의 ‘진연의궤’에 나오는 어만두에는 꿩고기, 닭고기, 표고버섯, 송이버섯 등이 들어갔다.

여섯 번째는 음식이 아니라 식재료 ‘분 한 동이’다. 여기에서 분은 밀가루를 가리킨다. 한반도의 일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밀은 겨울에 파종하여 한여름에 수확하는 겨울밀이다. 마침 윤선도의 생일이 한여름이라 황해도 일대에서 수확한 밀을 곱게 가루 내어 항아리에 넣어서 보낸 듯하다. 이것으로 칼국수나 만두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음식의 즙을 낼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윤선도의 아내는 매우 귀중한 식재료를 선물로 받았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일곱 번째 음식은 정과다. 온갖 과일과 함께 생강, 연근, 인삼 따위를 꿀에 조려서 만든다. 정과의 주된 재료가 무엇인지에 따라 생강정과, 연근정과, 인삼정과 등으로 부르지만, 봉림대군이 보낸 정과는 단지 ‘정과’라고만 쓰여 있다. 조선왕실에서는 인삼과 함께 꿀, 녹두가루, 오미자 등으로 만든 인삼정과를 가장 고급으로 여겼다.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그리고 열 번째에 적힌 것은 음식이 아니라 과일이다. 사실 처음 이 문서를 읽으면서 ‘서 진과’가 무엇일까 무척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런데 문서에는 ‘서’와 ‘진’ 사이를 띄어 썼다. 띄어쓰기를 한 이유가 서과와 진과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닐까. 알다시피 서과(西瓜)는 수박을, 진과(眞瓜)는 참외를 가리킨다. 마침 1629년은 윤4월이 끼어 윤선도의 생일날인 6월 21일이 여느 해와 달리 무척 더웠다. 그래서 아예 목판에 수박과 참외를 넉넉하게 담아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능금과 자두는 양이 적어 그릇에 각각 담아서 보냈다.

마지막에 나오는 음식은 홍소주다. 홍소주 만드는 방법은 윤선도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허준의 ‘동의보감’의에 나온다. “소주를 달일 때 먼저 자초를 얇게 썰어 항아리에 넣는다. 소주 한 병에 자초 5돈이나 7돈을 기준으로 한다. 뜨거운 소주를 자초가 있는 항아리에 넣고 오래 두면 먹음직스럽게 선홍색이 된다.” 허준은 이 방법을 속방(俗方)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조선왕실의 비법이었다.

봉림대군은 다음 해인 1630년 6월 21일 아침에도 윤선도의 집에 생일 음식을 보냈다. 음식의 가짓수만 따지면 1629년의 생일 때보다 훨씬 많은 열아홉 가지다. 특히 산삼편, 생선전유어, 전복숙, 해삼초, 홍합초 같은 왕실잔치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들어갔다. 그런데 1631년 6월 21일에 봉림대군이 보낸 선물은 지난 두 해와는 사뭇 다르다. 증편, 절육, 추복탕, 어만두, 전복숙, 해삼초, 홍합초와 같은 왕실 잔치음식이 아예 보이지 않고 오로지 식재료만 보냈다. 단지 홍소주 다섯 병만이 1629년과 1630년의 생일 때와 같다.

1631년 윤선도의 생일에 봉림대군이 보낸 선물이 왜 이렇게 간단해졌을까. 윤선도는 1628년 별시 문과 초시 장원 합격한 후 이 초시의 시험관이었던 이조판서 장유의 추천으로 3월 17일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어 4월 2일부터 강학청에서 대군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실 선비가 대군의 스승이 되면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윤선도는 1629년 12월 공조좌랑의 벼슬에 올랐고, 1631년 6월 20일에 호조정랑으로 진급까지 했다. 그러자 관리들 사이에서 윤선도를 향한 비난이 크게 일어났다. 그뿐인가. 봉림대군은 물론이고 인조 역시 윤선도에게 왕실 인척에 버금가는 선물을 자주 보냈다. 그러자 사헌부 관료들이 나서서 “정사(政事)의 체모가 전도되었으니, 개정하도록 명하소서”라고 인조에게 직접 대들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봉림대군이라고 해도 1631년 6월 21일 스승 윤선도의 생일에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른 채” 그전 해처럼 음식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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