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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의술로 독립운동… 중국 문화재 된 김필순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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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2 20:19:32 수정 : 2017-01-12 20: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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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은 최근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는 ‘열사가 된 의사들-의사 독립운동사’를 출간했다. 의사 독립운동가 중 주목할 만한 10인을 골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재구성한 이 책에는 독립신문을 발간해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힘썼던 서재필 박사와 ‘몽골의 신의(神醫)’로 불리는 이태준, 독일로 건너간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 온 집안이 독립운동가였던 김필순 등의 활약이 담겨 있다.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 용사공원에 있는 김필순 선생(작은 사진)의 주거지.
독립기념관 제공
이 가운데 김필순(1878~1919) 선생은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金奎植)의 매제이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과 상하이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낸 김마리아가 조카이기도 하다.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 의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이나 간호원양성소에서 교과서로 사용하는 서양의학 서적들을 다수 번역했다. 1907년 귀국한 안창호는 서울에 오면 늘 김 선생의 집에 머물렀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당시 김 선생은 형 김윤오와 함께 세브란스병원 바로 앞에서 김형제상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가게 위층을 안창호의 접견실로 제공했다.

1907년에는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망명했다. ‘105인사건’은 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 105인을 감옥에 가두는 등 독립지사들을 탄압한 것을 말한다.

김 선생은 이회영 등이 활동하던 지린성 통화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이상촌 건설과 독립군 양성 계획을 세웠다. 김 선생은 통화현에서의 생활이 여의치 않자 헤이룽장성 치치하얼로 이동했다. 치치하얼에서 중국 군대의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병원을 개업했다. 또 치치하얼에서 부상당한 독립군의 치료는 물론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김 선생은 거의 모든 수입은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다가 1919년 여름 숨졌다. 김 선생이 운영하던 당시 병원건물은 지금도 현지인들의 주거지로 이용되고 있다. 치치하얼시에서는 2005년 12월 이 지역을 문화재로 지정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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