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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책정농단의 시대… 독서라는 희망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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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27 00:59:22 수정 : 2016-12-27 00: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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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교정원고를 보낸 출판사로부터 메일이 왔다. 최근 출판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 부득이하게 출간일정을 내년 상반기로 조정한다는 양해의 내용이었다. 아마도 벚꽃이 필 즈음에서야 책이 나올 낌새다. 어지러운 시국상황이 도서시장까지 뒤흔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난달 국내 영화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무려 20% 가까이 추락했다고 하니 책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TV 뉴스라고는 거의 본 적이 없는 나 역시 10월 말부터 방송을 끌어안고 지내는 형편이다. 가뜩이나 출판시장이 불황이라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영화나 소설보다도 놀라운 일이 반나절 단위로 우박처럼 쏟아지니 사람들이 책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을 만도 하다. 문제는 이런 아노미(혼돈)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되느냐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다시 책과 재회하게 될까. 그렇다고 본다. 왜냐하면 작금의 사회현실은 등장인물의 국적과 이름만 다를 뿐 오래전에 나온 책에서 확인 가능한 상황이니까.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는 자신을 위기에서 살려준 집주인을 무참히 살해한다. 자신은 난세의 영웅이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저지른 사건에 불과하다는 조조의 주장은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소리다. 권력을 위해서는 전투병이 필요하고, 전투병을 호령하기 위해서는 군량미가 필요하다. 군량미의 확보를 위해서는 서민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서민들에게는 그만큼의 물질적 정신적 보답이 있어야만 한다. 이게 정치다. 나는 정치를 책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선악의 논리로 조조를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조의 모습이 요즘 자주 등장하는 정치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디 삼국지뿐이랴. 돈키호테는 어떻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또 어떤가.

이봉호 문화평론가
최순실발 국정농단 사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권력형 비리이다. 권력의 주변에는 불순분자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돈냄새를 맡은 시정잡배들이 들끓는 게 일상이다. 그들이 조금만 일찍이라도 독서의 즐거움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돈이나 권력보다 훨씬 가치있는 지성의 정원이 책세상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권력의 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민얼굴을 알아차릴 정도의 식견이 있었다면 세상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후면 2016년이 무대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광화문광장에서, 신문지상에서, TV에서 보았던 모습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권력과 정의 사이를 오가는 일종의 환영(幻影)이 아니었을까. 그 환영의 벽을 뚫고서 다시 제자리에 오롯이 서는 날, 우리 곁에는 믿음직한 한 권의 책이 자리를 함께 할 것이다. 그때는 권력자의 정체를 미처 몰랐다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겨울 칼바람이 불어온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보겠다는 각오로 한 해가 가기 전에 양서를 읽는 시간을 가져보자. 국정농단은 그렇다치고, 책정농단의 시대는 상상하기도 싫다. 우리에겐 아직 독서라는 희망이 남아 있다.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로잡듯이, 출판시장도 불황의 늪에서 멋지게 탈출하는 정유년(丁酉年)이 됐으면 한다.

이봉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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