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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26〉 조선 국왕의 출생 이야기

입력 : 2016-12-23 21:12:11 수정 : 2016-12-23 22: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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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탄생 미화·신성시… 정통성 시비 잠재우고 적통 강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롤이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트리가 거리를 장식한다. 지금부터 2000여년 전에 있었던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성인(聖人)에 대한 존경과 믿음의 문제이다. 진실성과 무관하게 사실로 믿었던 탄생의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많이 전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잉태하여 알 한 개를 낳으니 크기가 다섯 되[五升] 정도는 되었다. 금와왕이 이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니 모두 먹지 않았다. 다시 이것을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 갔다. 이것을 들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이것을 쪼개려 하여도 깨뜨릴 수가 없어 그만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것을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데 두었더니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이나 외양이 영특하고 신기롭게 생겼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탄생 이야기이다.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의 이야기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건국신화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하늘의 아들이며 비상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믿었다.

신화는 원시사회에서 신성시하는 신에 관한 이야기이자 구성원의 심층의식이 드러난 상징의 이야기다. 그래서 집단 구성원은 모두 그 이야기를 신성하다고 여기며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러나 원시사회가 역사시대로 넘어오면서 신화는 종교의 영역에 머물고 건국과 통치행위는 역사기록으로 전하게 되었다.

◆“수 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랐다”, 정조의 탄생

“장헌세자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두었다. 탄생하기 하루 전에 큰 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자욱해지더니 수십 마리의 채룡(彩龍)이 꿈틀꿈틀 하늘로 올라가니 그것을 본 도성의 사람들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급기야 왕이 탄생하자 우렁찬 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와도 같아서 궁중이 다 놀랐으며, 우뚝한 콧날에 용상의 얼굴과 위아래 눈자위가 펑퍼짐한 눈에 크고 깊숙한 입 등 의젓한 모습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중략) 그 후 백일도 채 못 되어 일어서고 돌도 되기 전에 걸었다.”

1752년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정조가 탄생한 기록을 ‘정조대왕행장’에 묘사한 글이다. 장헌세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인데 여의주를 안은 용이 침상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 용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었다. 또 탄생하기 전날에는 천둥이 치며 수십 마리의 고운 빛깔을 띤 용이 하늘로 올랐다고 하였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용은 임금을 상징하지만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장헌세자가 꿈을 꾼 것은 장차 임금이 될 아이를 잉태하게 됨을 의미하지만 태어나기 전날 실제 용이 하늘로 올라간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기록에서에서는 도성 안 백성들이 목격하였다고 하며 진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정조가 승하하자 어머니 혜경궁이 내린 행록과 묘지문에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이 글들은 모두 정조실록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당시 영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보면 한낮에 천둥이 치고 저물녘에는 천둥 번개에 우박이 내렸지만 수십 마리 고운 빛깔의 용들이 하늘로 오르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정조대왕행장에 보이는 자연현상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조선후기 신화와 같은 국왕 탄생이야기

신화와 같은 국왕의 탄생 이야기는 조선후기 실록에 대부분 보인다. 조선 초 건국의 주체인 태조와 태종에게서 더러 기이한 개인적 일화는 있어도 탄생 이야기를 통해 국왕을 신격화하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인조에 오면 신이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조의 경우 조부인 선조의 꿈에 붉은 용이 왕후의 곁에 있었으며, 효종은 백기가 침실에 들어와 창가에 엉겨 있다가 사라졌다. 효종의 꿈에 이불에 덮여 있는 것을 열어보니 용이어서 용상(龍祥)이라는 소자(小字)를 지어 손자인 숙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영조가 태어나기 3일 전 붉은 빛이 동방에 뻗고 백기(白氣)가 그 위를 덮었는데, 그날 밤 하얀 용이 보경당에 날아 들어가는 것을 궁인이 보았다. 순조도 궁인이 꿈에 오색구름 속에서 승천하는 비룡을 보았다. 탄생하는 날에는 오랜 장맛비가 그치고 갑자기 하늘이 개면서 무지개가 떴으며 찬란한 오색 빛이 드리웠다고 한다. 헌종과 철종의 탄생 이야기에는 용이 보이지 않지만 꿈을 매개로 신이한 현상을 표현하였다. 헌종의 경우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옥으로 새긴 나무를 상자에 넣어 주는 꿈을 꾸었으며, 철종은 명순왕비의 꿈에 친정아버지가 아이를 바치며 ‘이 아이를 잘 기르시오’라고 당부했다.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용·신성한 기운·신체 특징…국왕 탄생의 키워드

옛 사람들의 기록, 특히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을 정리할 때 간혹 과장된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없던 사실을 있는 것으로 조작하지는 않는다. 행장이나 묘지는 죽은 사람을 후세에 알리는 공식적인 문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선후기는 신화의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시대였다. 더 이상 신이한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였는데도 불구하고 왕의 탄생을 신성시하고 미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왕의 탄생 이야기에서 몇 가지 키워드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사물이 나타난다. 대체로 국왕을 상징하는 용을 꿈에서 보거나 실제 용이 나타나기도 하며, 헌종의 경우에는 상징하는 사물로 옥으로 아로새긴 나무[雕玉之樹]가 등장한다. 둘째는 상서로운 국왕의 탄생을 암시하는 자연현상으로 붉은 광채와 흰 기운이 산실에 드리운다. 이는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왕이 비범한 존재임을 알린다. 셋째 신체적인 특징이 보인다.

인조는 태어났을 때 오른쪽 허벅지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었다. 조부인 선조는 한고조 유방과 비슷하여 아이가 장차 왕이 될 운명임을 알고 절대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했다. 영조의 경우에도 오른쪽 팔뚝에 용이 서린 듯한 무늬로 아홉 개 점이 있었다고 한다. 차자로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던 인조나 영조가 이미 왕재를 타고났음을 상징하는 특징이다. 또 이렇게 태어난 국왕은 거둥과 외모가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왕을 닮은 외모는 아이의 혈통을 의미하며 백일 전에 서거나 돌도 되기 전에 걸었다는 것은 이미 성인의 풍도를 지녔음을 암시한다. 이 같은 현상은 정조 때부터 보이는 것으로, 그 이전 국왕의 탄생 이야기에 보이는 신성성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행동거지를 추가한 결과다.

◆인간의 시대에 왕권의 신성화란…

그렇다면 신이한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조선후기에 이러한 현상이 집중되는 것일까. 두 가지로 그 원인을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조선후기 국왕의 정통성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인조는 반정으로 국왕이 됐고, 효종은 둘째아들로 형인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후손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효종 이후 영조에 이르기까지 정통성의 시비가 일면 항상 소현세자의 혈손이 연루됐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이 선조부터 이어지는 혈통을 계승한 적통으로 확실하게 각인시키려 했다.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 군사론에서 찾을 수 있다. 군사론이란 국왕은 세속적인 군주이며 동시에 학문적으로 모든 백성의 스승이라는 조선후기에 나타난 통치철학이다. 숙종과 영조, 정조는 유독 이 군사론을 강조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인간의 시대인 조선후기, 그것도 조선왕조실록에 버젓이 등장하는 탄생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생뚱맞다. 실록의 글은 국왕조차 함부로 보기 어려웠으니 일반 백성들은 더군다나 알 수 없었겠지만,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장가들이 왜 이토록 국왕의 탄생을 신성시하며 미화했을까. 결국 명분을 중시하고 혈통을 강조하였던 조선후기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어찌 보면 세상의 변화를 무시한 혹은 알아채지 못한 막힌 사고방식에서 빚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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