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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경제적 지원에 직접 중매까지… 국가가 혼인 프로젝트 주도

입력 : 2016-12-16 21:11:39 수정 : 2016-12-16 21: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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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국가가 나선 결혼 이야기 2016년, 또 하나의 신기록이 생길 조짐이다. 통계를 집계한 이래 혼인 건수가 최저치를 기록할 전망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결혼을 꺼리거나 아예 포기하는 미혼 남녀가 늘고 있단다. 최근 5년째 혼인 건수가 줄어들면서 ‘결혼 빙하기’라는 말까지 나온다. 굳이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기 불황에 따른 청년실업률이 계속 높아지고, 내 집 장만은 더 힘들어지고, 결혼 비용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런데 ‘월급님’(!)은 지나치게 착해서 늘 제자리를 굳건히 지켜주시니….

경제적 빈곤이 혼인 회피로 이어지는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에 봉착한 우리에게 역사는 국가의 역할을 가르쳐 준다. “사족(士族) 자녀가 30세가 가까워도 가난하여 시집을 못 가는 자가 있으면 예조(禮曹)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헤아리고 자재(資材)를 지급한다. 그 집안이 궁핍하지도 않는데 30세 이상이 차도록 시집가지 않는 자는 그 가장을 엄중하게 논죄한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혜휼조(惠恤條)’의 내용이다. 가난하여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국가가 지원하여 혼인을 시켜야 한다는 내용과 노처녀가 되도록 시집을 보내지 않은 부모를 처벌한다는 조항을 법전에 올려놓았다. 늦도록 혼인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시대 혼례 풍경을 보여주는 엘리자베스 키스의 다색목판화. 18세기 조선에서 결혼적령기는 16세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나이가 차도 결혼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늘자 정조는 국가차원에서 이들을 지원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조사하여 보고하라!

1791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한성(漢城) 오부(五部)에 명을 내려 경제적 어려움으로 혼인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돈과 포목을 지원한 후 그 결과를 매달 보고하게 했다. 당시 한성부에는 이러한 지원이 필요한 노총각과 노처녀가 총 281명으로 파악되었으며, 혼인 프로젝트 추진 결과 1791년 5월까지 남녀 한 명씩을 제외하고 모두 혼인할 수 있었다.

결혼하지 못한 김희집이라는 남자는 현감을 지낸 김사중의 서손(庶孫)으로 28세였다. 그는 광주에 사는 처자와 정혼하였지만 그가 서얼임을 알게 된 처녀의 집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파혼당한 아픔이 있었다. 결혼을 못한 여인은 신씨(申氏). 신덕빈의 서녀로 21세의 노처녀였다. 그녀는 이원교의 아들과 1791년 7월22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씨 집안의 배신으로 파혼을 맞았다. 두 남녀는 파혼의 상처를 가진 채 자의반 타의반으로 혼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혼례를 위한 예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의 모습을 그린 폴 자쿨레의 다색목판화. 전통시대에도 결혼은 경제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가난한 처녀가 혼인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중 하나로 꼽혔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적극적 정책 추진, 혼인을 성사시키다!

한 쌍의 남녀가 혼인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 구익과 한성부 관리들은 난리가 났다. 정조가 야심차게 추진한 노총각 노처녀 혼인 프로젝트에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모두가 전전긍긍할 때 절묘한 제안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을 결혼시킵시다.” 한 방에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 아닌가! 구익이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추진하면서 그 사실을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위해 그간 경제적 지원에 그쳤던 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두 사람의 혼인을 위하여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국가가 혼인을 직접 주관하게 했다. 일반 백성의 혼인을 위하여 국가 전체가 나서게 되는 사상 초유의 대형 혼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이었다. 김희집과 신씨의 혼인 이벤트는 당시 큰 화제를 낳았다. ‘김신부부전’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목민심서 등에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이 기록되었고, 한양의 저잣거리에 소문이 파다하였다. 두 사람은 1791년 6월12일 혼인에 성공했다.

야심차게 추진했던 혼인 프로젝트가 완벽한 결실을 맺게 된 것에 정조도 뛸 듯 기뻐했다. 정조는 내각검서 이덕무에게 “이 같은 기이한 일에 아름다운 전(傳)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대가 한 통을 기록하여 김씨, 신씨 부부의 전을 만들어 아뢰라”고 지시했다. 정조의 명에 이덕무는 김희집과 신씨부인의 혼인 과정을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으로 지어 내각 일력에 실었다. 두 사람의 신상정보, 노총각과 노처녀가 되기까지의 상황, 혼인에 이르게 되는 과정, 혼례 절차와 장면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마지막에는 작자 자신의 평을 달았다.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나 시집간다! 정말이라니까!”

1791년 6월, 무척이나 덥고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던 어느 날, 천재 문인이었던 이옥은 과거시험 공부도 잘 안 되고 글도 짓기 어려웠다. 한가로움이 지나쳐 권태로움으로 변해갈 무렵 어린 종이 저잣거리에서 들은 재미있는 일 하나를 늘어놓았다. 바로 김희집과 신씨부인의 혼인 이야기였다. 이옥은 이를 소재로 단 3일 만에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인 ‘동상기’(東床記)를 지었으며,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묘사를 비롯하여 한양의 생활문화를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

“남자로 태어나면 아내 가지기를 원하여 일처일첩(一妻一妾)은 사람이면 모두 둔다고 하는데, 대저 장안의 팔만 가구에… 여염집 백성이라도 밥덩이를 먹을 만한 집이면 열다섯에 장가가고 열여섯에 아내를 얻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는 이 글에서 18세기 후반 서울의 가구 수가 8만 정도 된다는 사실, 당시 결혼 적령기가 16세 정도라는 것, 서울에 사는 남성은 첩 한 명쯤은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고급 혼수품, 화려한 신랑 신부의 의복, 러시아산 거울 등이 포함된 신방 물품, 전문 요리사가 만든 각종 음식들과 과일 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압권은 결혼을 바로 앞둔 노처녀 신씨의 심리묘사에 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측간으로 달려가 가만히 개를 불러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내일모레면 시집을 간단다.’…단지 하품만 한 번 하니, 그 처녀 민망하고 민망하여 또 개를 보고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너에게 허황된 말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너의 딸자식이다.’”

혼인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쁜 노처녀가 체면 때문에 그 즐거운 마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가 그곳을 지키는 개를 불러 ‘나 시집간다! 나 결혼한다고! 정말이라니까!’라고 외치는 모습을 통해 신씨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옥은 이 작품에서 당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를 ‘세력 없는 무반이 벼슬하는 것’, ‘가난한 선비가 과거시험 보는 것’, ‘가난한 처녀가 혼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씨는 가난할 뿐만 아니라 노처녀였으니 혼인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녀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대한 혼인식을 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결혼, 개인의 문제이기만 한가

2016년 역대 최저치의 혼인율 보도를 보고 있자니 18세기 후반 정조가 추진한 노총각 노처녀 혼인 이벤트가 떠오른다. 경제적 문제로 결혼을 할 수 없는 현실은 개인이 아닌 사회와 국가적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국가 정책이 되어야 한다. 온 힘을 기울여 혼인을 성사시키고 기뻐하는 정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가정이 번성하고 백성들이 즐거운 것이 태평성대 아니고 무엇일까.

곧 성탄이 다가오고 연말 이벤트로 우리 마음을 분주하게 한다. 옆에 누가 있어도 추운 겨울, 대한민국의 솔로들은 안녕하신가?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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