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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는 공간 제약 있지만 몰입도 최고… 단점이 장점 됐죠”

입력 : 2016-12-12 00:00:00 수정 : 2016-12-11 2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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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연극 ‘벙커 트릴로지’ 연출 제스로 컴튼 “용기가 없었어. 수십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편지를 뜯을 수는 없었어.”

독일군 저격수 알베르트가 마지막 숨을 헐떡인다. 아내가 탄 독약을 마신 직후다. 알베르트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석준. 땀과 고통으로 범벅진 얼굴 위로 회한이 스친다. 전장에서 말살됐던 인간성이 되살아난다. 객석과 배우 사이 거리는 1∼2m에 불과하다.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이 영화처럼 손에 잡힐 듯하다. 게다가 스크린에는 없는 숨소리, 땀내음, 생명의 에너지가 눈앞에서 박동한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아가멤논’의 마지막 장면이다.

2014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소개돼 화제를 모은 연극 ‘벙커 트릴로지’가 내년 2월19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과 만난다. 이 작품은 배우와 관객이 무릎을 맞댄 듯 비좁은 참호에서 극이 진행된다. 객석·무대 구분이 없다 보니 몰입도는 극한이다. 땀방울, 눈물 자국이 선연히 보이고, 몸싸움이 벌어지면 배우의 몸이 관객 발치로 날아든다.

영국 연출가 제스로 컴튼은 “한 배역에 두 명의 배우가 있는 더블캐스팅 시스템은 영국에서는 하지 않는 방식이라 궁금했다”며 “배우가 바뀌어도 움직임이나 연출의 의도가 일관성 있게 유지돼 감명받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배우와 관객을 밀실에 가둬버리는 무대는 영국의 원작 연출가 제스로 컴튼(28)의 고유한 특징이다. 공연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컴튼 연출을 9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났다. 그는 참호라는 갇힌 공간을 떠올린 데 대해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전했다.

“전 비좁은 공간에서 창작공연을 해본 적이 많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는 극장이 아니라 이름 없는 빌딩 한 구석을 빌려 공연하는 일이 빈번해요. 이런 작업에 익숙해지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어떻게 하면 극적 효과를 낼 수 있는지 배웠죠. 게다가 프린지 페스티벌에 가면 공간이 너무 좁아서 밀집된 느낌을 주는 공연이 많아요. 그걸 보며 이 단점을 어떻게 활용할까 생각했어요.”

‘벙커 트릴로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세 개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비극과 인생의 모순, 인간성을 통찰한다. 2013·2014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컴튼은 곧바로 영국 연극계가 주목하는 신예로 떠올랐다. “14살 때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할리우드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컴튼은 요크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공부보다) 늘 공연을 하러 다녀 교수님과 마찰을 빚었다”며 “공연을 하다 보니 관객 반응이 좋아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대학에서 꼴찌로 졸업했지만 책 출판은 동급생 중에 제가 첫 번째로 했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그는 한국 공연에 대해 한마디로 “환상적”이라고 했다.

“배우들이 연기를 정말 잘 해주셨어요. 특히 ‘모르가나’에서 이석준 배우의 존재감이 기억에 남아요. 대사를 하지 않거나 무대 중앙에 있지 않을 때조차 눈으로 그를 쫓게 되더라고요.”

영국과 한국 관객의 반응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느꼈다. 컴튼은 한국 연출을 맡은 김태형 감독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폭력적 장면에서 관객들이 보인 충격·두려움, 마지막에 흐느끼며 공연장을 떠나는 모습, 웃는 대목 모두 비슷했다”며 “한국 공연에서 원작과 같은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연출이 수정작업을 정말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관람 문화에도 엄지를 추켜세웠다.

“영국에서는 100명의 관객이 모이면 핸드폰이 울리고 사탕을 까먹거나 잡담하고 화장실에 간다고 떠나는 관객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한 명도 못 봤어요. 완벽했어요. 영국에서는 배우가 대사하는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공연 중에 피시 앤 칩스, 중국 요리를 먹는 관객들도 봤어요. 집에서 영화 보는 줄 알았나봐요. 연출로서는 분노의 눈을 하고 그들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관람문화와 함께 이 작품으로 수익을 보기 쉽지 않은 것도 그가 마주한 제약이다. 그는 “영국에서 이 작품의 객석은 단 60석이라 매진돼도 수익은 한계가 있다”며 “영국 공연계는 투어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 작품은 전국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가도 극장 측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포기하는 일이 많은 게 단점”이라고 말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인 ‘카포네 트릴로지’ ‘사이레니아’ 역시 ‘벙커 트릴로지’처럼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는 밀실 연출에 대해 “앞으로 이런 공연을 안 만들려는 건 아니지만, 제 스스로 이런 장르의 명성에 갇히기 전에 새로운 걸 하고 싶다”며 “무대를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반면 공연기간은 길지 않기에 앞으로 투어가 가능한 공연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앳된 얼굴에 영상산업이 더 어울릴 듯한 이미지의 그가 연극계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아직 젊어서겠죠. 공연은 좋아서, 열정에 휩싸여서 만드는 거잖아요. 저도 좋아해서 하고 있고요. 실수하면서 배우고 성장하고 싶어요. 작은 공연으로 많이 배워 나중에 큰 공연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편한 직업을 택해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는 것보다 지금 고생하더라도 스스로 뿌듯해하고 싶어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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