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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32번의 주인공 빌 월튼, 놀라운 패싱 능력의 백인센터

입력 : 2016-12-03 08:16:00 수정 : 2016-12-01 1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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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전설의 유니폼 넘버, 32번의 주인공…④빌 월튼, 반전운동 펼쳤던 '코트위의 히피'

◇가장 뛰어난 패싱 능력을 갖췄던 백인 센터

빌 월튼(1952년 11월 5일생)은 센터로서는 그저 그런 체구(211cm, 95kg)의 체구를 지녔다.

1975년 데뷔해 1987년 은퇴할 때까지 달랑 10시즌, 468게임만 뛰었다.

총 득점도 6215점(경기당 13.3점), 리바운드도 4923개(경기당 10.5)라는 압도적인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농구팀인 UCLA와 NBA 포틀랜드는 그의 등번호 32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또 미국프로농구 명예의 전당과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왜 그럴까.

빌 월튼은 짧지만 굵은 자신만의 농구역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미국 스포츠잡지 ESPN은 그를 가르켜 "가장 뛰어난 패스능력을 갖췄던 빅맨(센터)이었다"고 평했다.

1970년대 중후반 포틀랜드 감독이었던 잭 램지는 월튼을 전설적인 빅맨 라이벌인 빌 러셀(NBA우승 11차례)과 윌트 체임벌린(1경기 100득점)과 빗대 "러셀은 위대한 슛블러커이다. 체임벌린은 뛰어난 공격형 선수이다. 하지만 왈튼은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경기를 보는 완벽한 시야를 갖춘 센터였기 때문이다.

◇NCAA 결승서 야투 22개 중 21개 성공-3년연속 대학농구 MVP 차지한 히피

빌 월튼은 전설적인 대학 농구 감독 존 우든(1910년 10월 14일~2010년 6월 4일)의 마지막 애제자로 유명하다.

존 우든은 1967년부터 1975년까지 UCLA대학을 이끌면서 무려 10차례나 전미대학선수권(NCAA) 정상에 올려 놓은 명장이다.

빌 월튼은 UCLA가 NCAA 7연속 우승(1967년~1973년)을 차지할 때 마지막 두차례 우승을 책임지면서 대학농구 MVP에 올랐다. 

1974년엔 우승하지 못했지만 대학농구 MVP상을 차지하는 등 3년연속 MVP를 거머쥔 대 기록을 남겼다.

특히 1973년 멤피스 주립대와의 NCAA 결승때 22개의 야투 중 21개를 집어 넣으며 44득점하는 신기를 선보였다.

이는 NCAA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록 중 하나로 두고 두고 많은 이들 머리에 '빌 월튼'이름을 집어 넣은 계기가 됐다.

대학시절 내내 빌 월튼은 시대문화였던 반전, 히피운동에 심취했다.

반베트남전 시위로 체포된 적도 있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FBI를 비난하는가 하면 히피들처럼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전체 1순위로 포틀랜드 입단, 1976년~78년 전성기 누려

빌 월튼은 1974년 NBA드래프트서 전체 1순위(1라운드 1순위)로 포틀랜드에 입단했다.

기대에 걸맞게 1976~77시즌 NBA 정상에 팀을 올려 놓으며 챔피언결정전 NVP에 뽑혔다.

이어 1977~78시즌엔 단 56경기만을 뛰고도 정규시즌 MVP상을 받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빌 월튼은 고질병인 왼발목 부상과 함께 손목골절, 발가락 골절 등에 시달리다가 77~78시즌 플레이오프 도중 왼쪽 무릎 아래에 있는 주상골 골절상까지 당했다.

이에 시즌 뒤 월튼은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전체 1순위로 잡은 월튼에 미련을 가졌던 포틀랜드가 머뭇거리자 월튼은 부상을 핑계로 1978-79시즌 전체를 결장한 뒤 샌디에이고 클리퍼스(곧 LA로 연고지 이전)로 팀을 옮겼다. 

◇팀 옮긴 뒤 히피 삶까지 내던지며 재기에 힘써, 마지막 머문 보스턴선 식스맨 노릇 톡톡히

새로운 결심을 한 월튼은 상징과도 같았던 히피 스타일 머리를 잘랐고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으며 링컨 스타일의 수염까지 깎았다.

하지만 부상이 또 그를 잡아 끌었다. 

1979-80시즌 시범경기에서 무릎 부상이 재발해 14경기 출전에 그쳤으며 이후 2시즌을 건너 뛰었다.

왈튼은 83-84시즌 55경기, 84-85시즌 67경기를 뛰면서 나름 이름값을 해냈다.

1984-85시즌이 끝난 뒤 왈튼은 NBA 우승을 다시한번 맛보기 위해 보스턴 셀틱스와 LA레이커스를 놓고 저울질한 끝에 보스턴 유니폼을 입었다.

1985~86시즌 월튼은 백업 센터로 무려 80경기에 나서 경기당 6.8리바운드와 7.6득점을 올리며 식스맨상을 차지했다.

그해 월튼은 올라주원이 버틴 휴스턴을 제치고 NBA정상을 다시한번 밟았다.

월튼은 이듬해 10경기만 뛴 후 은퇴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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