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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21〉장원의 비결:그들은 어떻게 수석을 차지했나

입력 : 2016-11-18 21:32:21 수정 : 2016-11-18 21: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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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이슈 간파하고 해법 제시… 최고 권력에 날 선 비판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쳤으니 수험생들은 지금쯤이면 고생 끝에 찾아온 자유를 즐기고 있겠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답안을 문득문득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에 큰 시험이 수능만 있는 게 아니니 최선을 다한 후 결과를 차분하게 기다릴 일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위인들도 수험생 시절이 있었다. 입신양명의 첫 관문이던 과거에 응시한 그들은 갈고닦은 기량을 쏟아낸 뒤 국가의 선택을 기다렸다. 출제자인 임금의 의도를 간파하고, 젊은이다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뽐내며 채점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들이 장원의 영광을 안았다.


조덕순은 현실 문제에 집중해 그에 대한 대응을 밝힌 답안지를 내 장원급제했다.
◆정몽주, 문무를 함께 강조한 ‘공민왕스타일’

고려말, 국가와 정부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골치를 앓았다. 단순한 근심을 넘어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었기에 국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고심은 깊어갔다. 공민왕은 자주의식이 강한 임금이었고, 문(文)을 숭상하면서도 상무적 기풍 또한 자못 강한 군주였다. 그는 시대적 고충과 현안에 대한 해법과 지혜를 과거시험을 통해 구하고자 했고, 즉위 9년차 되던 1360년의 문과 시험은 그 호기가 되었다.

공민왕이 제시한 시험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어쩔 수 없어 무위(武威)를 써야 한다면 어떤 책이 핵심적인 병서이며, 어떤 술책이 의(義)에 합치되는가? 둘째, 천하 국가의 통체(統體)에 있어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쓰는 도리의 요점은 무엇인가? 공민왕은 시험문제의 서두에서 “편안할 때 위급할 경우를 잊지 않고, 잘 다스려질 때 혼란할 경우를 잊지 않는 것”이 국정 최고 운영자가 가져야 할 유비무환의 자세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외적의 침입에 따른 변방의 위태로움은 이미 초미의 현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속내와 말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공민왕은 문과 무를 아우른 자기 스타일의 인재를 선발하여 외적도 막고 내정도 강화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정몽주는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다. 답안의 첫머리에서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행하고 들어와서는 재상의 일을 행하는 사람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의 모델”임을 밝혔고, 본디 문무는 둘이 아니며 이를 잘 병용한 나라가 부국이자 강국이었음을 역사적 맥락과 근거를 들어 강조했다. 특히 한때 ‘세계제국’을 이루었던 원나라가 100년 남짓한 사이에 쇠퇴의 길로 접어든 원인을 “상하가 안일하여 문치에 흠이 있어도 흠이 있는 줄을 모르고, 무비(武備))가 소홀하여도 소홀한 줄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지적한 대목은 타산지석치고는 너무도 실감 나는 사례였기에 채점관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한편 정몽주는 자신이 관료가 된다면 동양 사회에서 문무겸전의 상징적 모델로 인식된 태공망(太公望), 사마양저(司馬穰?),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재목이 되겠다는 뜻을 피력함으로써 유자(儒者)에게도 파천의 기상이 있음을 드러내어 위정자들을 안심시켰다. 결국 정몽주가 추구한 것은 문무를 겸한 사람이었지만 억세고 거친 무(武)가 아니라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는 문(文)의 덕목에 충실하여 그 에너지가 임금, 국가, 백성을 위해 발산될 수 있는 그런 무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민왕이 기대했던 정답이었고, 정몽주는 바로 짚어 장원급제로 이어졌다.

우리는 정몽주를 문약(文弱)으로 연상되는 문신의 표상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과거시험에서 보여준 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었고, 실제 그는 최영 등과 함께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실천했던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그를 위인으로 기억한다. 


1360년 치러진 과거에서 장원한 정몽주의 시권. 정몽주는 중국 원나라가 쇠퇴한 원인으로 문무가 균형 있게 관리되지 못한 점을 꼽으며 문무겸전의 관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조덕순, 시험은 현실이자 생물이다

1690년 경상도 영양 주실마을에 사는 조덕순이란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 왔다. 그는 도성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에게 지금 가장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일종의 여론 탐문이었다. 문과 응시생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도성 안의 여론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도성 사람들이 한결같이 도둑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하자 조덕순은 치안 문제가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밤새 대안을 골똘히 생각했다. 시험문제로 출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시험장에 들어간 조덕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문제가 출제되었기 때문이었다.

과거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국가와 위정자가 그때그때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들이 시험문제가 되어 출제되었으니 생물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신이 국도(國都)에 들어오던 날에 사람들에게 맨 먼저 지금의 제일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오직 도적을 다스리는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전하의 대궐에 들어와서 전하의 물음을 받드오니 또한 오직 도적을 다스림이라는 물음이셨습니다.” (1690년 조덕순 문과장원급제 시권)

밤새 고민한 결과일까. 조덕순의 답은 한 차원 높았다. 그는 경찰력의 증강, 법집행의 엄정함과 같은 물리적 처방보다는 ‘교화’라고 하는 인정(仁政)을 통한 근본적 처방론을 강조했다.

“어느 시대인들 도둑이 없고 어느 나라인들 도적이 없으랴만, 그것을 다스리는 법은 세대마다 각기 같지 않습니다. 혹은 법을 엄격하게 하여 다스리는 자가 있었고, 혹은 교화를 행하여 그치게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신은 이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이 더 나은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仁)으로 백성에게 젖어들게 하여 스스로 교화되도록 하는 것이 어찌 임금 된 이가 먼저 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1690년 조덕순 문과장원급제 시권)

과거는 현실이었고, 현실 문제에 귀 기울였던 조덕순의 대응은 주효했다. 그러나 현실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처방만큼은 물리적 수단이 가지는 미봉책보다는 근본을 바로잡는 근원책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장원의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정몽주 초상.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세당, 최고 권력을 향한 날 선 비판

1660년 증광문과의 시험관들은 국가재정 운용의 원칙을 물었고, 박세당은 국가적 관리 시스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백성이 풍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언급과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다”는 표현으로써 군주의 자세를 환기시켰는데, 임금에게는 대단히 언짢은 표현일 수도 있었다. 박세당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은 왕실의 ‘축재(蓄財)’였다.

“생각건대 사방의 정공(正貢)이 오래토록 내장(內藏)의 사적(私的)인 비축물이 되었습니다. 궁중에서 취하는 것이 설령 내어 쓰기에 편리함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천하를 가지고 받드는데 재물을 모으려 한다는 탄식이 없지 않습니다. 탁지(度支)의 장부책은 그저 안일하게 보존될 뿐이고, 사농(司農)의 경비는 텅 비었음을 고하고 있습니다.”(1660년 박세당 문과장원급제 시권)

박세당은 하찮은 토공(土貢·세금)일지라도 전부 지관(地官·재정담당부서)으로 하여금 관장하여 왕실의 재정적 간섭을 원천 차단하는 취지의 답안을 작성하여 장원 합격했다. 행여 죄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장원이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박세당이 응시한 과거는 현종의 즉위를 기념하여 열린 별시였다. 집권 초기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려는 의미에서 마련한 과거였으므로 시대적 분위기가 경직돼 있지 않았다. 박세당 시권의 어투가 거침이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시험관의 인적 구성이다. 박세당이 응시한 과거의 시험관 중 허적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일컬어지는 김육 아래서 국가재정 운용의 철학과 방식을 배운 실무형 관료였고, 누구보다 공익성을 중시해 김육이 자신의 경제 철학 및 정책을 계승할 사람으로 믿고 육성한 인물이었다. 박세당의 장원급제에는 허적의 영향이 적잖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박세당은 서인, 허적은 남인이었음에도 박세당을 장원으로 선발한 것은 경제정책에 있어 정파를 초월했던 반듯한 공직자들이 조선에도 존재했음을 뜻한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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