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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16세기 말 동아시아 대전란”

입력 : 2016-11-18 21:10:13 수정 : 2016-11-18 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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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부터 중·일 역사서까지 20여종 섭렵
3국의 기록으로 다시 들여다본 임진왜란사
야심가 히데요시의 속전속결 일본 평정에
국제적 식견없는 조선 왕의 아둔함이 ‘불씨’
편협한 영웅주의 배제… 객관적으로 재구성
현병주 지음/바오/1만8000원
수길일대와 임진록/현병주 지음/바오/1만8000원


임진왜란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나온 책이지만 저자의 폭넓은 사고와 유연함이 돋보인다. 임진왜란을 객관화해 16세기 말 동아시아 대전란으로 풀이했다. 구한말 한문학자인 저자는 유성룡 ‘징비록’의 한계를 인식한 터 위에서 중국과 일본 쪽 사서를 죄다 섭렵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동양 3국 기억의 공유를 시도한 책이다.

저자의 이런 노력은 국내 우물 안 개구리식 역사 해석을 넘어선다.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은 실제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정치적 목적에 따라 영웅주의로 흐른 측면이 강했다.

책에 따르면 3국은 전쟁의 명칭부터 달랐다. 한국은 임진왜란, 중국은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일본은 분로쿠의 역(文祿の役)이다. 그간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침략당한 조선’이 주류다. 영웅들의 활약으로 국난을 극복한 사건으로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중심의 영웅주의가 두드러진다.


일본 에도 시대에 출간된 ‘회본태합기’에 수록된 일본 전함을 물리치는 거북선의 모습.
저자는 거의 한 세기 전 학자임에도 지금 같은 편협한 영웅주의적 시각은 배제했다.

저자는 서두에서 “사실에 치중하여 할 수 있는 대로 맹랑한 말, 허튼소리는 기록에 넣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참고 문헌들도 다양하다. 국내 기록은 ‘징비록’을 비롯한 10여 종, 일본 쪽은 ‘서정일기’(西征日記) 등 10여 종, 중국 쪽은 제갈원성(諸葛元聲)의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등 7종이다. 임진왜란 관련 서적은 대부분 구입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먼저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를 접한 조선 조정의 모습이다. “왕은 정사 황윤길에게 히데요시의 인물됨을 물었다.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눈에 정기 쏘이는 것이 반드시 조선에 출병을 하고야 말 것’이라 했다. 왕은 군비 단속할 일을 의논하다 다시 부사 김성일을 불러 히데요시의 위인을 물었다. 김성일은 ‘히데요시의 눈이 쥐눈 같아 큰 뜻이 없는 인물’이라고 했다. 대신들은 태평성대에 군사가 다 무엇이냐며 주청했다. 왕도 ‘일본이 명을 친다 하는 것은 가재가 바다를 건너려 하고, 벌이 거북의 등을 쏘려 하는 셈이다’고 했다.”


회본태합기에 수록된 명량해전에서 맞붙은 일본군과 이순신 장군의 모습.
도서출판 바오 제공
국제적 식견 없는 아둔한 왕으로 인해 조선은 전란에 휩싸였다.

전쟁 동기에 관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대화 장면이다. “노부나가는 자기의 넷째아들 히데카쓰를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주며 하는 말이 ‘양자에게 장래 영토를 얼마나 물려줄 터인고?’ 하고 물으니 히데요시는 ‘바다 건너 조선을 치고, 명나라를 치고 할 터이니 아직 작정할 수 없지요’ 하고 답했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엄청난 말에 그만 깔깔깔 웃어버렸다.” 주군 노부나가와 일본을 평정한 히데요시에게는 이미 조선 침략 의도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일본 평정이 조선에는 불행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보수(保守)에 만족했을 아시카가(足利)나 성미가 추군추군한 도쿠가와만 같아도 조선에 그렇게 된 불(침략)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일본의 전국이 공교롭게 오다나 히데요시의 손으로 번개 치듯 평정되니 그 파문이 조선이나 명나라로 밀려갈 것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안이함과 나태함이 침략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조선의 패장 신립에 대한 저자의 의견도 특이하다.

천혜의 요새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은 어리석다고 지금도 회자된다.

그러나 저자는 “조령의 관문은 조방장의 군사 몇 명만 지켜도 깨어지지 아니할 천험이요, 세 길목으로 올라오는 일본 군사가 조령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죽령으로도 넘을 터이니 충주에서 진을 치면 조령과 죽령의 두 길목을 막는 것인즉 조령만을 지키지 아니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서 “신립의 군사가 새로 주워 모은 죄다 서투른 군사인즉, 죽을 땅에 집어넣고 악전고투할 만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저자는 조선 지배층의 관점과 그에 저항한 반체제의 관점뿐 아니라, 하위 집단의 관점도 포함시킨다. 또한 전쟁의 국제적 성격도 충분히 조명한다”고 말했다.

현병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중국 산둥여자학원 장연연 교수는 “저자는 그 어떤 장수나 충신열사에 대한 영웅화도 시도하지 않는다”면서 “전쟁에 참여한 세 나라의 입장을 시종일관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평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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