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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시어로 녹여낸 일상의 기억

입력 : 2016-11-17 20:47:29 수정 : 2016-11-17 20:4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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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따라 날아갈 듯/ 구름 따라 올라갈 듯/ 그래도 버티며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키는/ 것들// 해가 쨍쨍할수록/ 바람이 세찰수록/ 저항이 더 강해지는/ 것들// 작은 집게에 매달려/ 집착도 방종도 아닌/ 중용을 지키는/ 것들”

김구슬(63·협성대 영문과 교수) 시인의 첫 시집 ‘잃어버린 골목길’(서정시학·사진)에서 발견한 ‘빨래의 중용’은 단아하고 이채롭다. 여성의 섬세한 감성으로 빨랫줄에 걸려 하늘을 향해 펄럭거리는 옷자락들의 중용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선시(禪詩)로 일가를 이루었던 부친 김달진(1907∼1989)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건 무리일까. “그래서 서울에 오셔서는 뭘 하셨지요?/ 아, 아버지요?/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역경(譯經)을 하셨지요./ 팔만대장경 번역 같은 거”라고 시인은 ‘아버지를 그리며’에서 소개하거니와 아버지의 유전자는 늦깎이 시인 딸의 첫 시집에도 눅진하게 스며들었다.

“통금을 알리는 호각소리 서슬 퍼렇던 길/ 아, 젊은 날의 사랑과 애수의 골목길도 지나왔습니다./ …인생은 골목길입니다/ 사랑과 눈물, 희망과 좌절의/ 굽이굽이 흐느끼는 강물을 따라/ 좁고 나지막하게 흐르는 골목길을 향해 가면/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을 것만 같습니다.”(‘잃어버린 골목길’)

표제작에서 진술하는 골목길들은 지나온 삶의 미세한 기억의 총체일 터이다. 그것들을 회억하면서 감상에 젖기도 하고 스스로 위로하는 차원에 머물 수도 있지만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마지막 5분이 주어진다면?// 무한히 확장된/ 시간의 집중과 응축.// 인생은/ 한 점을 응시하기 위한/ 긴긴 놀이였네.”(‘한 점’) 인생은 한 점을 향해 나아가는 긴 놀이라는 허망하면서도 냉정한 관찰, 이러한 태도는 기실 시인의 숙명이기도 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면의 상처를/ 확인하는 일이다/ 꽁꽁 싸맨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어/ 봉합을 확인하는 일이다.”(‘시를 쓴다는 것’)라거나 “꿈과 상처의 양피지 안에서/ 솟구치는/ 부끄러움이/ 노을을 붉게 타오르게 한다”(‘백운호수’)고 시 쓰는 이의 자의식을 들여다보는 시들이 웅변한다. 상처와 부끄러움을 태우며 “각자의 마음 깊은 곳/ 말할 수 없는 말”을 찾아가는 일에 동참한 김구슬 시인의 동력은 어디에서 찾을까. 고요한 듯 강력한 그 사랑이었을까. “식물적인 사랑이란 그런 거야, 허약하고 느린 것 같지만 무한히 팽창하고 확장하여 성벽까지도 뚫어버릴 수 있는 그런 거, 강력하고 간절한 사랑이지.”(‘식물적인 사랑’) 시인은 “내 정신의 궁극인/ 어머니, 아버지께 이 시집을 바친다”고 서문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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