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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가지 방식으로 풀어낸 단 하나의 이야기

입력 : 2016-11-17 20:47:33 수정 : 2016-11-17 20:4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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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 언제 어느 페이지를 펴든 이야기에 빨려들 수 있는 소설은 없을까. 긴박한 스토리에 목줄을 매단 듯 끌려가다가 지칠 무렵이면 과연 이 이야기에 이토록 시간을 빼앗길 이유가 있는지 피로하게 자문할 수도 있다. 이야기가 그리 흥미로워 빨려 들어갔다면, 그나마 일단 작가의 대단한 재능을 상찬해야 한다. 그러하지도 못하고 지지부진 제 흥에 겨워 독자를 무시한 채 이야기만 난해하게 늘어놓는 경우는 또 어찌 보아야 할까. 대중 독자에 영합하지 않고 언어가 지니는 속성의 본질을 쉼 없이 탐구하며 깊이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문장과 이야기를 진설하는, 격이 높은 작품도 물론 있다. 이런 작품과 지은이들은 고독하지만 나름대로 일정한 자장 안에서 스스로 위무하고 위안 받는 혜택을 누리는 편이다.

특정 인물에 집중하지 않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평등하게’ 풀어낸 신예 작가 정세랑. 그는 “처음에는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되지만 다시 읽으면 어디선가 마주친 이들의 이야기가 퍼즐처럼 맞춰질 것”이라면서 “전위적인 스타일보다는 독자들과 편안하게 호흡하며 힘을 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창비 제공
2014년 창비 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부각된 신예 정세랑(32)의 소설들은 영리한 전략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편도 아니고, 언어 그 자체의 속성과 깊은 예술적 탐색을 노리는 난해한 스타일은 아니다. 초두에 언급한 ‘언제 어느 페이지를 펴도 이야기에 빨려들 수 있는 소설’을 그녀는 시도했다. 50여명의 사람 이름을 짧은 장의 제목들로 내세우고 그이들의 사연을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창비)로 묶어냈다. 이들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전개되지만, 다 읽고 다시 앞에서부터 훑어가면 서로 연관된 관계들을 발견해낼 수도 있다.

이야기들은 대부분 병원에 근무하는 인원들을 근간으로 환자와 그 가족들로 퍼져나가는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송수정은 어머니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사로부터 선고받는다. 어머니는 극성을 부리며 수정의 결혼을 앞당겨 떠들썩하게 주변에 소문낸다. 그 행위는 딸과의 이별 의식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별 파티를 준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기윤은 응급실에서 56번 칼에 찔린 남자를 맞아 남자의 몸 위에 올라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질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하지만 실패한다. 그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중독된 이들과 비슷한 ‘아드레날린 정키’다. 피바다가 된 응급실 바닥에 미끄러지면서도 사력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270도 각도로 목이 잘려 덜렁거리는 여자도 그날 응급실에서 만났다.

조양선은 열여덟 살 난 딸 승희 나이에 승희를 가졌다. 부부간에 불화가 잦았고 끝내 이혼했고 그 아래에서 승희는 자랐다. 폭이 좁고 톱니가 달린 빵을 써는 칼이 싱크대 아래 칸에 있는 걸 뜨악하게 발견했지만 무시했다. 택배인 줄 알고 무심히 문을 열어주었더니 웬 남자가 나타나 승희를 붙잡고 헤어질 수 없다고 행패를 부린다. 유부남 애인이었다. 승희가 끝내 거부하자 익숙하게 싱크대 문을 열고 그 칼을 꺼내 승희 목을 그었다. 270도 각도로 꺾어진 승희의 목을 부여안고 양선은 넋을 잃었다.

김성진은 병원 보안요원인데 동성애자다. 폐쇄병동에서 반사회적 성격장애 환자 강한정이 난동을 부려 간호사를 위협하는 상황을 극적으로 제압한다. 그는 그 순간을 가족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제정신인지 분명하게 가족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아쉽다고 되뇐다. 지연지도 레즈비언이지만 남성 친구들은 쿨하게 그녀에게 대학시절의 우정을 보여준다. 소현재는 공기의 질에 민감해 환기가 잘 안 되는 지하에 가거나 독한 방향제를 쓰는 공간에 가면 어지럼증을 느끼고 어릴 때는 기절까지 했다. 그 민감함으로 그는 산업의학을 선택한다. 이 친구가 존경할 만한 ‘어른’에게 “느리게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는지” 묻는다. 그 어른, 소설 속 다른 챕터의 ‘이호’라는 인물쯤으로 짐작되는 원로급 의사 선생의 답은 작금의 촛불집회 국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은 소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선생이 던질 수 없는 거리까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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