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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백성 억울함 왕이 직접 듣고 해결 지시… ‘소통의 정치’ 실현

입력 : 2016-11-11 21:01:15 수정 : 2016-11-11 21: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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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백성이 국왕에게 올린 청원서:상언(上言)
최근 종영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임금이 된 이영은 신하와 백성의 소리를 가까이서 듣겠다며 용상이 아닌 용상 앞의 계단에 걸터앉는다.
KBS 제공
◆“백성의 이야기를 가까이 듣고 싶다”

얼마 전 꽃미남 왕세자 박보검이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종영됐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에서 왕세자 이영이 국왕으로 즉위하여 편전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국왕이 용상이 아닌 용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회의를 주재하자, 신료들은 의아해하였다. 한 신료가 왜 용상에 앉지 않는 것인지 묻자, 왕이 된 박보검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료나 백성과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어서, 좀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런 국왕이 드라마에나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이 곧 하늘이라고 교육받았던 조선의 국왕들은 백성의 소리를 잘 들어서 국정에 반영하는 것이 어진 임금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조선 국왕이 이루어내야 할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국왕이 백성의 소리를 들어서 그들의 형편을 아는 것을 ‘하정상달’(下情上達)이라 하는데, 현대로 하면 ‘소통’이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 정치를 행하는 국왕이 이상적인 군주상이었다. 지금도 ‘소통’은 우리의 화두이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직장에서는 직원과 상사가 서로 대화가 안 통한다고 답답해한다.

소통은 상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야 객관적인 진단과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서로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내고, 자기 입장만을 주장한다면 불통이 될 수밖에 없다. 불통이 깊어지면, 가정이나 사회가 병들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에도 불통과 불신이 만연하였을 때 괘서가 나붙고, 백성들이 따르지 않고, 결국에는 민란으로 확대되기까지 하였다. 

이이명의 처 광산김씨가 영조에게 올린 상언. 광산김씨의 당쟁의 와중에 손자의 목숨을 지키려 했던 거짓말을 한 죄를 고백하고 손자가 피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마지막 비빌 언덕, 국왕

조선시대 백성은 국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백성이 국왕에게 자신의 사정을 알리는 수단은 ‘신문고’, 글을 직접 국왕에게 올리는 ‘상언’, 왕의 가마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전 상언’과 ‘가전 격쟁’ 그리고 궁궐 문으로 들어가 징을 울리는 격쟁 등이 있었다.

태종은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의 원통한 일을 국왕에게 전달할 수 있게 제도화했다. 세종 때에는 신문고와 상언이 꾸준히 늘었다. 16세기에는 가전 상언도 급격히 늘었다. 인조 이후로 국왕의 궁궐 밖 거동이 잦아지면서 가전 상언이나 가전 격쟁 등도 정례화됐다.

백성들이 무조건 국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관서에 호소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사헌부에 억울함을 호소해야 한다. 사헌부에서도 그 사연을 다루어주지 않고 기각하였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국왕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국왕에게 제출된 상언들은 승정원을 통해서 국왕에게 보고됐다. 국왕은 사안별로 관서에 보내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게 하였는데, 보고는 5일을 넘길 수 없었다. 국왕이 관련부서에 신속한 보고를 요구했던 것은 백성의 억울함을 속히 해결해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훈국등록’에는 갓난아이를 데려다 키운 한 군인의 사연이 전한다.

◆종친부터 노비까지… 갖가지 사연들

그렇다면 어떠한 사람들이 무슨 사연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였을까? 위로는 국왕의 친족인 종친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분층에서 민원을 제기하였으며, 남성뿐 아니라 여성의 참여도 활발했다.

이들의 억울한 사연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사연도 있는 반면 재산권 보호를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소송문제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민원으로 행정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명종은 사안별로 구분하여 억울한 사연만을 국왕에게 제출하도록 법제화했다.

또한 민원이 급격히 늘면서 대리 민원인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막기 위해 상언을 올린 사람은 3일 이내로 관에 나와서 본인 인증 절차를 거치게 하였고 인증을 거친 사안만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장서각에서 열리고 있는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글’ 전시에도 여성이 손자와 시동생을 위해서 영조에게 올렸던 한글 상언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상언은 1727년(영조 3) 노론 대신 이이명의 처 광산김씨가 영조에게 올린 상언이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 책봉 문제를 두고 소론과 노론 간에 격렬한 다툼이 있었고 노론의 핵심이었던 4명의 대신이 반역죄로 처단된 사건이 있었다. 이후 노론 측에서 지지했던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반역죄로 처단된 대신 중 하나인 이이명의 처는 격랑의 시기에 반역죄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당시, 손자를 살리기 위해 “손자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피신을 시켰다는 사실을 상언으로 올렸다. 손자의 존재를 알리고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거짓을 고한 죄를 용서하고 이이명의 손자에게 관직까지 내렸다. 그러나 다시 정권이 소론에게 넘어가자 대간들은 이이명의 손자가 죽음을 가장하여 거짓을 보고하고 죄를 피했다고 주장하며 그와 그를 숨긴 가족에게 죄가 있다는 상소를 빗발치게 올렸다.

이 사실을 안 김씨부인은 다시 상언을 올렸다. 가문의 대를 잇도록 하려고 손자를 피신시킨 것은 자신이니 죄는 본인에게 있다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이처럼 정치적인 문제로 멸문의 화를 당할 위기에서 여성이 가문을 위해서 올렸던 상언도 있지만 아들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였던 훈련도감 군인의 상언도 있다.

훈련도감 군인 포수 겸사복 김유천은 자녀가 없었는데, 아내가 아산에 있는 친정에 다녀오다 길에 버려진 갓난아이를 데려다 길러 훈련도감 군인이 되었다. 그는 두 번의 호란이 있었을 당시 인조를 호위하여 금군으로 승진하고 이후 수문장이 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산 관아에서 그가 아산 관노의 자식이니 관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의 양아버지인 김유천은 훈련도감에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여 아산 관아로 공문을 보내는 등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아산 관아의 압박이 계속되자 결국 그는 인조에게 상언을 올리게 되었다. 상언을 받은 인조는 훈련도감에 이 사안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다.

훈련도감에서는 젖먹이를 데려와 길렀다는 김유천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지만, 이미 면천되어 수문장이 된 사람을 다시 관노로 삼을 수 없다는 의견을 내었다.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국민의 소리는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

두 건의 상언이 호소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판결이 난 것은 아니었다. 광산김씨 부인의 두 번째 상언에 대한 처결은 김씨부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자는 결국 유배되었다. 반면 훈련도감 포수 김유천은 국왕에게 올린 상언으로 양자를 관노로 보내지 않아도 되게끔 하였다.

이처럼 상언을 올린다고 해서 억울한 사연이 모두 해소되지는 않았다. 힘없는 백성이 올렸던 수많은 상언 중에는 격식이 잘못되었거나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며 국왕에게 올라가지도 못하고 폐기처분되기도 했다.

과연 국왕은 상언의 몇 퍼센트를 접하였는지, 국왕이 보고받은 상언 중에 어느 정도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논의 대상이 되었던 상언들만이 기록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낼 수 있었고, 그 소리를 듣고 해결하려던 국왕이 존재했다는 사실 앞에서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국민의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그들은 국민의 아픈 곳을 보살피고 있는지….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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