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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아버지 이식은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가난했다. 후실인 어머니 박씨 부인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직접 농사를 짓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다. 그래도 자식만은 가르쳤다. 일찌감치 이황을 서당에 보냈다. 똑똑한 이황. 여섯 살 때 집으로 돌아오며 배운 글을 큰 소리로 외웠다. 감짝 놀란 박씨 부인 왈, “세상에선 과부의 자식은 배움이 없다고 헐뜯는다. 너는 조금 배운 것을 사방에 떠들고 다니느냐. 배움이 그리 얕아서야 비웃음을 사지 않겠느냐.”

겸손했던 이황. 어머니의 영향 때문일까. 박씨 부인은 열두 살 난 아들을 숙부 송재공에게 보내 논어를 배우게 한다. 조선 최고의 대유(大儒)는 그로부터 꽃핀다. 자식을 가르치는 DNA. 박씨 부인만 그랬을까. 지금도 자식 가르치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서당은 아이들이 꿈을 키운 곳이었다. 마을마다 있었다. 1918년 일제가 공포한 ‘서당규칙’. 서당을 통제, 폐쇄하기 위한 법제다. 많은 서당은 이때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 경기도에 등록된 서당은 2619곳. 이로 미루어 조선 팔도의 서당은 수만 곳에 이름 직하다.

서당의 전통은 초등학교로 이어진다. 내용은 다르지만 아이 가르치는 것은 똑같다. 그런 초등학교가 줄어들고 있다. 시골은 특히 더하다. 젊은이는 농촌을 떠나고 아이 울음소리는 잦아드니. 1982년 이후 문 닫은 학교는 3600여곳에 이른다.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한 일도 있다. 폐교 위기를 견뎌 낸 학교가 하나둘 나타난다. 평창 대화면 신리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서울대 평창캠퍼스 교수와 학생들이 힘을 보태 십시일반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어린 학생이 모였다. 2007년 전교생 15명. 지금은 45명으로 늘었다. 아이들 노랫소리는 마을을 들뜨게 한다. 폐교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시골에서 자란 많은 어른들. 살아난 학교가 시들지 않는 꽃처럼 버티어 주기를 바랄 터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시골학교 살리기 운동을 벌이면 어떨까. 인성과 지식이 꿈틀거리는 시골학교, 우렁찬 아이들 글 읽는 소리. 그런 곳에서 제2, 제3의 퇴계 이황이 나오지 않을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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