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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정다운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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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24 23:35:08 수정 : 2016-10-24 23: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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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뫼르소 통념과는 다른 행동
부조리한 세상 무관심 세태는 진행형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말한다. “인간은 시시포스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시포스처럼 행복해야 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혹 시시포스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신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운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신 없는 우주에서라면 모든 것이 인간에게 허용될 것인가. 시시포스의 사슬이 온전히 풀릴 수 있을 것인가. 도스토옙스키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부당한 고통과 전지전능하면서도 선한 신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는 아버지 살해와 무관하지만 이런저런 사실로 범인으로 지목되고 마침내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는 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전혀 악의가 없는 정당방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형이 선고된다. 이글거리는 정오의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던 그는 부조리한 사회적 인습 탓으로 여긴다. 그의 첫 번째 실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것이었다. 왜 뫼르소는 울지 않았을까.

알제리의 선박회사에 근무하는 뫼르소는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죽자 장례를 치르러 간다. 밤을 새우면서도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저 넋나간 표정으로 주위 사람만 쳐다볼 뿐이다. 마치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장례를 마친 다음 그는 자기에게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알제리로 돌아오자마자 상장(喪章)을 단 채 해수욕장으로 나가 마리를 만나 즐기다가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파리의 지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거절한다. ‘사람이란 어떻게 살든 결코 생활을 바꿀 수 없으며, 어느 경우든 생활이란 다 마찬가지’란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깡패 레이몽의 편지 대필이 화근이 돼 휘말리게 된다. ‘바다와 모래와 태양, 피리 소리와 샘물 소리의 이중의 침묵 사이에 이곳의 모든 것은 정지’돼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어머니의 장례식 날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뫼르소는 마치 태양을 향해 시위라도 하려는 듯,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체포된다.

부조리한 세상의 이방인이었던 뫼르소에게 모든 것은 그저 그랬다. 세상사와 가치를 무차별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할 따름이다. “타인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 따위가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살인범으로 기소된 내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이렇게 세상에 반항하는 이방인의 순수 초상을 보인다. 그러다가 결말 부분에서 자연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된다. 아이러니다. ‘정답다’와 ‘무관심’이 어떻게 호응할 수 있을 것인가. 뫼르소의 독특한 ‘무관심’의 심리는 거듭 곱씹어도 문제적이다. 격렬한 항의의 풍경과 무차별적 무관심의 풍경이 양극에서 종종 연출되는 지금, 여기서도 뫼르소의 초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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