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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왕실 인장 집대성… 생애 짧았지만 예술 사랑 길이 남겨

입력 : 2016-10-22 13:00:00 수정 : 2016-10-22 10: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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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헌종의 문예취향과 ‘보소당인존’ 2014년 4월 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선왕실의 인장 9점을 한국에 정식 반환했다. 이 인장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해병대 장교가 덕수궁에서 불법으로 반출한 문화재로, 후손이 보관해오고 있었다. 문화재청이 인장문화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관계 전문가에게 유물의 국적과 내용, 가치 등에 대해 자문해 중요문화재임을 확인한 후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식 환수한 것이다. 

창덕궁 낙선재 일대의 모습. 낙선재를 조성한 헌종은 보소당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에서 서화를 감상하며 허련과 같은 화가를 불러들여 그림을 그리게 했다.
환수한 유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국새·어보 4점과 왕실에서 소장한 사인(私印: 개인 도장) 5점으로 총 9점이었다. 이 중 왕실 소장 사인은 ‘쌍리’ ‘우천하사’ ‘연향’ ‘춘화’ ‘향천심정서화지기’ 5점이다. 이 인장들이 반환되기 전 유물의 국적과 원소장자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헌종의 명으로 왕실에 소장되어 온 인장을 집대성한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이란 책에 인영(印影)과 그림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조선시대 왕실의 소장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흔히 ‘미완의 문화군주’로 평가되는 헌종의 손때가 묻은 왕실의 구장품이란 점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었다. 


‘쌍리’를 새긴 도장(위 두 사진). 두 마리의 용을 조각했다.아래 두 사진은 ‘향천심정서화지기’를 새긴 도장. 헌종 자신이 소장한 서화, 탁본에 찍기 위해 제작한 수장인이다.
◆혼란의 조선후기, 문화군주 헌종

헌종(憲宗·1827~1849)은 조선의 24대 국왕이다. 23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의 삶은 다른 국왕들에 비해 존재감 없이 비친다. 한 나라의 국왕 혹은 한 사람으로서도 그의 삶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그는 할아버지 순조(純祖)가 사망하자 8세의 나이에 조선 국왕으로 등극했다. 너무 어린 나이였으므로 할머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했다. 당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세력을 다투던 세도정치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고, 각종 자연재해와 천주교 신자 학살, 이양선(외국 철선) 출몰 등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등 급박한 정세가 이어졌다. 15세의 나이에 친정체제를 갖추고 개혁하고자 했으나 삼정(전정·군정·환정)의 문란과 국정의 혼란으로 민생고가 더욱 가중되었다. 그는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고 23살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다. 재위기간 동안 ‘동국사략’(東國史略) ‘삼조보감’(三朝寶鑑) 등의 문헌을 만들고 1837년 각 도에 제방을 수축하는 등 치적도 있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흔히 그를 미완의 문화군주라 일컫는다.

헌종은 왕권 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인 1847년(헌종 13) 창덕궁 승화루 앞에 낙선재라는 건물을 짓는다. 그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에는 ‘낙선재상량문’이 실려 있다.

“듣건대, 순(舜)임금은 선(善)을 보면 기뻐하여 황하가 쏟아지는 듯하였다. …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음은 규모가 과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화려한 서까래를 놓지 않음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이다.”(원헌고 권16, 낙선재상량문)

이 건물이 궁궐의 여타 건물처럼 붉은 흙을 바르지 않고, 단청도 하지 않은 이유를 살필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소박함을 내세우고자 한 의미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의 군주로서 편할 날이 없었던 헌종은 이곳에서 문예적 취미를 가지며 시름을 잊었던 듯하다.

그는 낙선재 보소당을 중심으로 고조당, 유재, 연경재, 자이당 등에서 많은 서화작품을 감상했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는 그에게 글씨를 써서 올려 보내라고 특명을 내리기도 했고, 소치 허련을 여러 차례 낙선재로 불러 직접 그림을 그리게도 했다. 서화 외에도 인장과 전각에 취미가 있었다. 조두순과 신위로 하여금 조선시대 여러 국왕이 개인 용도로 사용하던 인장과 왕실에서 수장하던 인장, 그리고 자신의 인장 등을 모아 ‘보소당인존’이란 인보(印譜)를 편찬토록 했다. 보소당은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란 의미로 낙선재에 걸려 있는 현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헌종의 인장 컬렉션과 ‘보소당인존’

‘보소당인존’은 역대로 왕실에 전해 내려오던 여러 사인은 물론 헌종이 소장했던 서적 및 서화, 탁본 등에 찍었던 인장을 비롯해 중국 옛사람의 모각인, 강세황 성해응 신위 권돈인 김정희 조희룡 남병철 등 걸출한 문인 묵객들이 사용한 여러 인장 등 실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 후기 인장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다. 이 인보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을 비롯한 국내의 여러 중요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소당에 소장되어 있던 헌종 컬렉션의 이 인장들은 헌종 사후 덕수궁으로 옮겨졌고, 고종 때의 궁궐화재사건(1904년)으로 왕실의 서적과 소장품이 소실되면서 인장들도 상당 부분 파손되었다. 당시 고종황제는 덕수궁 화재로 소실된 인장들의 복원을 명하였고, 전각(篆刻)의 명가였던 정학교 유한익 강진희 김태석 등에 의해 다시 복각(復刻)되었다. 이후 헌종 때로부터 보관하여 오던 인장들과 고종 때에 복각한 인장들이 뒤섞여 덕수궁에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있다. 


창덕궁 낙선재와 승화루 일대의 모습. 낙선재를 조성한 헌종은 보소당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에서 많은 서화를 감상했고, 허련과 같은 화가를 불러들여 그림을 그리게 했다.
성인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환수한 인장, 수준 높은 왕실 소장품

한·미 정상회담 때에 환수한 인장들은 모두 헌종 때에 제작한 ‘보소당인존’ 가운데 인장의 실물을 실제에 가깝게 그린 책에 수록되어 있어 고종 때의 모각본이 아닌 헌종 당대의 유물임을 확인했다. 특히 인장의 재질이나 손잡이의 조각 등이 매우 뛰어나 수준 높은 왕실의 구장품임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다.

‘쌍리’(雙?)를 새긴 인장의 상단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했고, 인문 또한 두 마리의 용을 새겼다. ‘보소당인존’에서는 이 인장의 문양을 ‘쌍리’라고 기록하고 ‘송선화옥인’이라는 부수적인 정보를 기입했다. ‘리(?)’는 본래 현실세계에 없는 상상의 동물로 뿔이 없는 용을 일컫는다고 한다. 기록에 보이는 ‘선화(宣和)’는 북송(北宋) 휘종 때의 연호로, ‘선화옥인’은 휘종이 썼던 옥도장임을 밝힌 것이다. 휘종은 문화재를 수집, 보호하고 궁정서화가를 양성하는 등 ‘선화시대’라는 문화사상 중요 시기를 이끈 문예의 황제로 평가된다. 또한 스스로 음악·원예·서화 등에 능통했고, 특히 옛 서화를 모아 ‘선화서화보’를 만들 정도로 예술 방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당시 휘종을 중심으로 궁중에서 모았던 서화에는 여러 수장인이 찍혀 있는데, 그 가운데 방형과 원형의 쌍리인이 포함되어 있다. 환수한 인장은 그중 원형 인을 조선에서 모각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로부터 금석학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여러 인보도 함께 수입했다. 이 인장은 당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인보에서 고인이나 황실의 인장을 모각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는 헌종이 소장한 서화 및 탁본에 찍기 위해 제작한 수장인이다. 금이 간 얼음같은 문양이 있는 동석에 사자가 웅크리며 뒤쪽을 응시하고 있다. 인문 ‘향천심정서화지기’는 향천이 서화를 자세히 조사하여 결정하고 찍은 인장이란 뜻이다. 향천은 헌종의 호이며, 이 인장으로 그가 소장했던 미술품에 진품이자 자신의 소장품임을 확인하기 위해 찍었음을 알 수 있다. 헌종은 향천 외에도 ‘원헌’ 등의 아호를 썼고, 당호로 보소당·향소관·유재 등을 쓰기도 했다. 헌종은 이러한 아호로 매우 많은 인장을 제작했고 현재는 고궁박물관에 있다.

헌종은 짧은 삶을 살다간 비운의 군주였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청나라의 강희제에 비견할 수 있으며, 특히 인장에 있어서는 ‘보소당인존’이라는 방대한 왕실의 사인을 정리하여 남긴 문예군주로 평가할 수 있다.

성인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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