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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문학기행] 낭독의 놀라운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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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20 23:23:02 수정 : 2016-10-20 23: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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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심에서 벗어나 나를 찾는 행복함
박씨전 피화당에 온 듯 피안의 시간
나는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소리내어 읽기’를 하고 있다. 시간이 없을 때는 단 몇 줄이라도, 책에서 좋은 문장을 골라 소리 내어 읽곤 한다. 사실 처음에는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는데, 새벽이 되자 너무 졸려서 교과서를 천천히 낭독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그때부터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많이 힘들 때마다, 잡념을 몰아내고 싶을 때마다 소리내어 읽기를 한다. 많은 사람에게 낭독해주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내가 내 자신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러면 ‘머나먼 풍경’처럼 느껴지던 문학 작품 속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처럼, 바로 지금 겪고 있는 내 인생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소리내어 읽기는 아주 쉬운 것이지만 너무도 놀랍게,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줄 수가 있다. 타인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내 삶을 바라볼 수도 있다. 소리내어 글을 읽는 시간은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시간, 내 마음 깊은 곳의 숨겨진 나만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정여울 작가
고전 소설 ‘박씨전’에는 ‘피화당’이라는 장소가 나온다. 말 그대로 ‘화를 피하는 공간’이다. 병자호란 때 나라님도 벼슬아치들도 심지어 가족조차도 지켜주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을,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신혼 첫날밤부터 남편에게 버려진 박씨부인이 전쟁의 포화와 남성들의 위협으로부터 여성을 지켜주던 공간이 바로 피화당이었다. 세상이 지켜주지 않는 여인을, 가장 고통받고 가장 핍박받은 또 다른 여인이 지켜주는 곳. 그곳이 바로 피화당이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시댁 식구는 물론 하인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던 박씨에게 피화당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아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피화당 주위로 나무를 가득 심어 피화당 주위를 감싸는 박씨 부인의 지혜는 지금 읽어도 놀랍다. ‘이후 불행한 때를 만나면 저 나무로 화를 면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예감대로 전쟁은 일어났고, 남자도 당해내지 못한 청나라 장수 용골대를 박씨는 피화당 주변의 거대한 숲을 이용해 화공 작전을 펼쳐 무찔러버린다. 개인적 슬픔을 망각하는 피화당이라는 공간이 집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으로 변신한 것이다.

나에게는 소리내어 읽기가 바로 피화당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시끄러운 곳이라도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낭독을 시작하면, 그곳이 곧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피화당이 된다. 내게 낭독의 시간은 좋아하는 작품을 혼자 소리내어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내 목소리, 내 마음의 무늬를 알게 되는 시간’, 내가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도시 속에서 미디어와 함께 살아가다보면 ‘나’를 자꾸만 ‘타인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내가 미디어나 타인의 시선에 길들지 않은 상태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더 어려워질 때. 소리내어 글을 읽으면, 내가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삐걱삐걱 덜컹덜컹거리면서도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느낌, 내 마음의 아픈 그림자를 만지는 느낌이 드는 시간. 소리내어 책을 읽는 시간, 내가 나의 피화당이 되는 시간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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