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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제3의 자주적 평화·통일론 모색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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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11 01:19:52 수정 : 2016-10-11 01: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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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서 제안하는 평화론
한민족 염원 보장해주지 않아
서구 좌우이념의 장벽을 넘어
한민족의 동질성 회복 나설 때
남북한이 휴전 이후 지금처럼 극한으로 대치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단말마로 몰고 가고 있는가. 동양의 태극음양론에 따르면 음의 극단은 양으로 가지 않을 수 없고, 양의 극단은 음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에서 큰 변화, 문명사적 대전회(大轉回)가 올 조짐인지도 모른다. 인류 문명은 종래처럼 패권주의에 의해 운영될 경우 인종적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식민지지배와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한민족이 인류 평화의 새 길을 모색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사와 남북분단은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과 평화로 평행선을 긋고 있다. 우리는 흔히 우리 민족을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말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과 수난을 당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통일을 지연시키더라도 결코 6·25전쟁과 같은 신냉전 체제의 대리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해방공간과 6·25를 둘러싼 극비문서들이 해제되어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들이 있다. 해방 후 한민족을 바라본 외국(강대국)의 눈은 무섭고 냉엄하기까지 하다. 정치학자 라종일 박사(가천대 석좌교수)에 따르면 영국의 한 공식문서는 “신탁통치 안 하면 한국은 분단된다”고 예단하고 있었다 한다. 해외의 한국인 사회를 보면 대개 분열하여 상호 분쟁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근대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을 바로 독립시키면 반드시 분열하고 싸울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만 결과적으로 맞았다.

우리 속담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다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외국인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비친 것이다. 하기야 나라 잃고 세계의 유랑 민족이 된 한국인이 잘난 체라도 해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근대문명의 중심 세력이 된 서양은 이성에 대한 신뢰와 함께 칸트의 ‘영구평화론’(1795년)을 생산했고, 1차 세계대전의 쓰라린 경험 이후 국제연맹(1920년)이 창설되었지만 미국의 불참으로 유명무실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다시 유엔(1945년)이 탄생했다. 현재 지구촌은 다소 느슨한 체제인 유엔이라는 국제체제 속에 있다. 유엔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탄생할 수도 없었다. 북한이 도발한 6·25전쟁도 스탈린의 세계전략 하에서 기도된 것임이 공개되어 있다.

일제의 암흑 속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1910)을 주창했다.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의 흑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서양 제국의 동양침략을 일본이 중심이 되어 막고, 동양의 평화를 구축하자는 취지에서 옥중에서 작성된 ‘동양평화론’은 매우 제한된 평화론이었지만, 우리 민족이 제안한 최초의 평화론이었다. 영구평화론은 이성으로 근대문명을 일군 서양의 매우 주체적인 자신감의 발로였다면, 동양평화론은 일본식민지 백성의 운명을 앞둔 ‘순교자적 호소’였다. 아마도 안중근 의사가 오늘에 살아있다면 반드시 세계평화론을 제창했을 것이다.

가부장·국가사회의 출범 이후 인류는 항상 국가주의(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갈등과 싸움 속에 있었다. ‘팍스 로마나’ 혹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팍스(Pax)는 평화(peace)를 의미하지만, 어디까지나 패권국가를 전제로 평화가 이룩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팍스라는 말은 전쟁이 내포된 평화이다.

서양의 평화론 중에는 ‘홉스의 평화론’이 있다. 칸트의 평화론이 이상주의적인 면이 많다면 홉스의 평화론은 매우 현실적이다. 개인의 안전과 행복은 국가에 달려있다는, 매우 국가중심적인 이 평화론은 국가의 무력과 다른 법적·제도적 강제력에 의해 질서와 평화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유엔은 권력의 속성으로 볼 때 강제력이 약한 느슨한 결속체이고 국가는 강한 결속체이다.

유엔과 국가라는 제도도 결국 국가주의와 세계주의의 갈등 속에 인류의 평화가 매달려 있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는 칸트와 홉스의 어느 쪽도, 다시 말하면 서구가 제안한 어떤 평화론도 한국의 평화와 통일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제3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다. 외세에 의한 한국의 농락과 사대주의에 의한 ‘의례에 갇힌 예송’(禮訟)과 같은 당쟁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둘러싸고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평화와 통일 방안이 절실하다.

제3의 평화와 통일론은 우선, 서구의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 둘째, 힘에 의한 통일을 포기해야 한다. 셋째, 한민족 특유의 문화적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심정적 대화’나 ‘통사정 대화’, ‘상호 호혜적 교류’와 함께 단군의 자손이라는 ‘공동기반(한민족공동체)’을 상기시키는 대화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끝으로 남북한을 우리의 전통 사상인 음양 관계로 보거나 천지인(天地人) 관계로 보는 ‘음양통일론’이나 ‘천지인통일론’을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기 방식으로 생각하는 습관과 자신감이 필요하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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